이영종 중앙일보 통일전문기자.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전문기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두 통의 편지를 보낸 것으로 확인되면서 김정은식 ‘친서(親書) 정치’에 이목이 쏠리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6일(현지시간) 뉴욕 롯데 팰리스 호텔에서 기자회견을 개최해 “나는 김정은 위원장으로부터 두 개의 편지를 받았다”고 말했다.

두 편지가 어떤 경로로 전달됐고, 무슨 내용을 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이것이 (비핵화를) 끝내기를 희망하는 그의 태도라는 관점에서 점에서 볼 때 감명적 편지들”이라고 강조했다. 김정은 위원장이 비핵화나 북·미 관계와 관련해 트럼프 대통령을 만족시킬만한 모종의 제안이나 해법을 친서에 담은 것이 아니냐는 해석이 나오는 배경이다.

김정은 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보낸 친서는 지금까지 모두 5번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역사적인 첫 북·미 정상회담 개최 등 급격한 관계진전을 감안해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만큼 김정은의 대미접근에 힘과 속도가 실리고 있다는 방증이다. 김영철-폼페이오 라인이나 김계관 1부상이나 최선희 부상 등 외무성 대미통을 가동한 대미협상이 진척을 보지 못하거나 막힐 때마다 김정은은 친서 정치를 펼치곤 하는 양상이다.

이를 두고 트럼프의 성향이나 통치패턴을 볼 때 실무선에서의 문제를 최고지도자가 단칼에 해결하는 톱다운(Top down) 방식이 효과적이란 점을 김정은과 북한 대미외교 베테랑들이 간파했다는 얘기가 나온다.

북한 외무성의 고위 관료들이 트럼프 행정부를 비난한 것이 문제가 돼 북·미 정상회담이 무산될 위기에 처했던 직후인 지난 6월 1일 미국을 방문한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첫 김정은 친서를 전했다. 이어 6·12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이후 7월 초 방북한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을 통해 김정은 위원장은 두 번째 친서를 띄웠다. 이처럼 북·미 관계가 꼬이거나 비핵화 협상이 교착 상태에 빠질 때마다 김정은은 친서를 통해 돌파구를 마련하는 해법을 구사해왔다.

이는 남북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지난 2월 10일 청와대를 방문한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은 오빠인 김정은 위원장의 친서를 문재인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남북정상회담을 제안하는 내용이었다. 이 친서는 핵과 미사일 도발로 한반도를 전쟁위기로 몰아넣었던 김정은이 유화 국면으로 전환하는 분수령 역할을 했다.

이런 움직임은 김일성·김정일 집권 시기와 크게 다르다. 당시엔 북한의 최고지도자가 직접 한국과 미국을 대상으로 친서 정치를 펼치는 경우는 드물었다. 긴박한 외교현안이 생기거나 수해나 재난으로 긴급원조가 필요할 경우 대표단을 구성해 우방국이나 공산권 국가를 방문해 친서와 함께 대북지원을 요청하는 수준에 그쳤다.

특히 북·미간 최고지도자 레벨에서의 친서 교환이나 특사 교류는 매우 예외적인 경우였다. 내용도 짧고 의례적인데다 대부분 비공개에 그쳐 구체적인 내용을 베일에 싸였다. 주로 미국 측이 북한에 먼저 관계개선에 대한 메시지를 던지는 경우였다.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지난 1992년 4월 김일성 북한 주석에게 보낸 편지에서 “미국과 북한 사이의 관계개선과 정상화를 지지한다”는 입장을 보낸 건 북·미 최고지도자 간 서신 교환의 초보적 사례로 거론된다.
 
미국 대통령들의 대북 친서를 통한 구애는 조지 W 부시 집권 시기에도 있었다. 2007년 12월 초 김정일 위원장에게 보낸 친서에서 “북한이 연말까지 모든 핵 프로그램을 완전히 공개할 경우 북미관계 정상화를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당시 뉴욕타임스는 “부시와 김정일 사이에 존재해 온 냉전(cold war)을 뛰어넘는 거대한 도약(a huge leap)”이라고 평가할 정도로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버락 오마바 대통령은 2009년 12월 김정일 위원장에게 친서를 보내 북한의 비핵화 추진을 전제로 한 북·미 양자관계의 비전을 제시했다. 미국 뿐 아니라 북한도 워싱턴 측에 친서를 전달하는 경우가 있었다.

남북관계와 한반도 정세가 격랑에 휩싸일 때마다 김정은의 친서 외교가 서울과 워싱턴을 공략하고 있는 모양새다. 상대 최고지도자가 유혹을 느낄 수준의 말과 제안을 내놓으면서 마치 남북관계와 한반도 및 주변 정세를 쥐락펴락 하는 듯하다. 실무 대화나 협상이 꼬인 상황에서 김정은의 이 던지는 말 한마디에 이목이 쏠리는 가운데 친서는 상당한 폭발력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말의 성찬만으론 상대의 신뢰를 얻거나, 이를 토대로 한 관계진전을 이룰 수 없다. 냉혹한 국제 외교무대에선 더욱 그렇다.

김정은 위원장은 지난 2월 문재인 대통령에게 보낸 첫 친서에서 남북관계 개선의지를 분명히 했다. 4·27 판문점 정상회담은 그 뜻을 구체화해 담은 남북 간의 서면 약속이다. 특히 ‘완전한 비핵화’는 북한의 핵 폐기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김정은의 전향적인 행동조치가 기대됐다. 6·12 북·미 정상회담 공동성명 문안에도 거듭 등장했기 때문이다. 합의문에 서명하고도 이런 저런 조건을 걸어 실행을 지연시킨 뒤 시간 끌기와 보상 챙기기에만 몰두했던 김일성·김정일 시기의 구태에서 벗어날 것이란 관망도 적지 않지만, 아직 변화된 모습은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북한 최고지도자 김정은 앞에는 이제 ‘진실의 순간’을 향해 가는 모래시계가 놓여있다. 위기탈출이나 국면 전환용 친서 정치만으로는 모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정상 간의 서면 약속이라 할 수 있는 친서까지 빈 종잇장이 된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자신의 편지 한 통에 트럼프와 백악관이 반응하고, 유력 외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상황에 김정은이 만족하고 있을 때가 아니란 지적이다. 진정성이 결여된 말의 잔치만으로는 개인이나 공동체는 물론 국가체제도 오래 버티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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