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1-21 21:19 (수)
[김준범 ‘오늘과 내일’] 정치인의 말 '살생'보다 '상생'에 역점둬야
[김준범 ‘오늘과 내일’] 정치인의 말 '살생'보다 '상생'에 역점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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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10.29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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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해직언론인협의회 공동대표전 중앙일보 정치부 부장대우전 국방홍보원장
80해직언론인협의회 공동대표
전 중앙일보 정치부 부장대우
전 국방홍보원장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치는 말로 한다. 그런데 정치인들의 말에는 상생(相生)의 언어도 있고 살생(殺生)의 언어도 있다. 상생·협력하는 말은 평화와 공존을 가져오지만 살생·대립하는 말은 분열과 갈등, 공멸을 불러 온다.

불행하게도 우리나라 현대 정치에서 말은 전자 보다는 후자 쪽에 더 기울어져 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런 말들 중에는 수명이 오래 유지되는 것도 있고, 반짝하다가 소멸되는 말도 있다. 대표적으로 ▲빨갱이 ▲퍼주기 ▲종북 또는 좌파 ▲좌빨(좌익+빨갱이) ▲말 바꾸기 ▲대통령 병 같은 말들을 꼽을 수 있는데, 다분히 한국적인 정치문화에서나 어울리는 말들이다.

여기서 가장 장기간 맹위를 떨치고 있는 것은 단연 ‘빨갱이’와 ‘퍼주기’일 것이다. 빨갱이란 말은 건국이후 박정희-전두환-노태우-이명박-박근혜 정권에 이르기까지 가장 오래도록 맹위를 떨쳐 온 고성능 말 폭탄으로 자리매김했다. 이 말은 2018년 현재에도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다.

동족상잔의 쓰라린 경험을 가진 한국인들은 대부분 강한 래드 콤플랙스(red complex)를 갖고 있다. 그런 한국 사회에서 공산주의자 또는 그와 연관된 개인이나 집단을 의미하는 ‘빨갱이’로 낙인 찍혔을 때 그들이 받게 될 충격과 공포심은 상상을 초월한다. 거기에 연좌제까지 생각해 보면 끔찍하기조차 하다.

해방과 함께 생겨난 남북분단과 그 이후 한반도의 반쪽을 지배해 온 이데올로기는 반공·북진·멸공통일 같은 것들이었다. 이승만의 자유당 정부는 시종일관 북진통일을 외쳤다. 그러다가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이후 박정희 혁명정부는 “반공을 국시(國是)의 제1의로 삼고~”라며 반공을 혁명공약 맨 앞줄에 내세웠다. 이때부터 반공은 단순히 이념적인 수사(修辭)가 아니라 국정운영의 기본 바탕으로 자리 잡았다.

반공이념에 투철한 혁명정부는 그 후 삼선개헌과 유신헌법 제정 등을 통해 무려 18년이라는 장기집권을 기록하는 동안 한국사회를 온통 반공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국민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빨갱이’로 낙인찍히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극도로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다. 빨갱이라는 말 앞에서는 어떤 논리도, 이유도 맥을 못 추었다. 빨갱이로 의심 받을까 두려워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1990년대 초반 무렵, ‘빨갱이’가 식상할 때쯤 ‘종북’(從北)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했다. ‘빨갱이’가 직설적이고 원색적이라면 ‘종북’은 보다 교양 있고 학술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말로 언론에서도 빈번하게 사용돼 왔고, 지금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종북’이란 말은 ‘북한을 무조건 추종한다’는 것인데, ‘빨갱이’와 사실상 별다른 차이도 없다. 교양인이 차마 ‘빨갱이’라는 말을 입에 담을 수는 없으니 ‘종북’이나 ‘종북좌파’라는 말로 바꿔 쓰는 정도일 것이다.

‘좌빨’은 ‘좌익 빨갱이’의 줄임말로, 두 개념을 합성어로 만든 것은 그만큼 적대감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가 있다고 봐야 한다. 작년 대선 때 한 야당 후보는 ‘종북’, ‘좌빨’ 같은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그는 자신의 지지세력을 똘똘 뭉치게 하고, 좌익에 대한 증오심과 적대감을 고조시키는 데는 일정부분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개표결과는 대참패였다. 막말과 저질 언어폭력으로 무장한 후보를 유권자들은 더 이상 용납하지 않을 만큼 성숙해 있다는 사실을 그들만 모르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퍼주기’라는 말처럼 정치적으로 민감하고도 고약한 단어도 드물다. 주로 대북 지원사업에 대해서만 사용된 이 말은 남북간 교류협력 등을 못마땅해 하는 사람들이 애용해 왔다. ‘퍼주다’는 “무책임하게 함부로 마구 주다”라고 국어사전에 나와 있다. 그냥 주는 것이 아니라 ①무책임하게 ②함부로 ③마구 준다는 3가지 부정적인 의미가 이 짧은 3음절의 단어에 담겨 있는 것이다. 이 말은 2000년 6.15 남북 공동선언 이후 김대중 정부의 대북 지원사업에 대해 당시 야당이 처음 사용하면서 정치무대에 본격 등장했다.
 
당시 한나라당은 이렇게 부정적인 말을 남북경협 모든 분야에 적용하면서 DJ 정부의 대북지원 사업에 주홍글씨처럼 낙인을 찍어대곤 했었다. 똑같은 대북 지원사업이라도 DJ·노무현 정부가 아니면 ‘퍼주기’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뒤 세 차례 남북 정상회담이 열리고, 미국과 북한이 벌써 두 번째 정상회담을 앞두고 있는 2018년 현재에도 한국의 정치인들 중에는 ‘퍼주기’라는 말의 유혹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최근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자유한국당 의원들은 예의 남북 철도·도로 연결사업에 대해 ‘퍼주기’ 잣대를 들이댔다. 이에 대해 더불어 민주당의 박주민 의원은 “퍼주기가 아니라 퍼오기”라고 되받아 쳤다. 적절한 대응이라고 본다.

‘말 바꾸기’는 DJ가 대통령이 되기 직전까지 그를 끈질기게 괴롭히던 말이었다. DJ가 대선에 세 번 떨어진 뒤 불출마 선언을 한 뒤 영국으로 떠났다가 몇 년 후 귀국해  대선에 출마한 것을 두고 자신이 한 말을 바꿨다며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그에 대한 이미지를 한껏 깎아내리기 위한 전술로, 여기에 정치권은 물론 유력 언론들도 적극 가세했다.

세상에는 세 가지 거짓말이 있는데, 하나는 처녀가 시집 안 가겠다는 말이고, 둘째는 노인이 일찍 죽어야 한다는 말, 셋째는 장사가 밑지고 판다는 말 등이라고 한다. 여기에 하나를 더하자면 정치인이 ‘다음 선거에 출마 않겠다는 말’이 아닐까. 정치인이 출마를 번복한 것을 두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야만과 무례는 한국정치가 일찍이 극복했어야 할 악습 중의 하나일 것이다.

또 하나 고약한 말로는 ‘대통령 병’을 들 수 있다. 이 역시 유독 DJ에게만 사용돼 온 말이다. 역대 선거사를 보면 대통령 선거에 다섯 번 이상 출마한 사람도 없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DJ의 대통령이 되려는 꿈을 한 낱 질병 차원으로 깎아내림으로써 그의 이미지 전반을 통째로 뭉개버렸다. 이에 반해 초등학교 시절부터 장래 희망이 대통령이었다는 김영삼 대통령에 대해서는 한번도 ‘대통령 병’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이 말 역시 그 용도가 오직 DJ에게만 국한된 맞춤형으로, ‘DJ 저격용 말 폭탄’인 셈이었다.

인격살인에 가까운 언어폭력은 지금도 보수를 자처하는 정당이나 정치인들의 입을 통해 심심치 않게 유통되고 있다. 그들은 진정한 보수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스스로를 보수라고 부르고 있다.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보수를 모독하는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자칭 보수라며 목청을 높여 온 한국의 정치인들이여, 몇 달 전 서거한 존 메케인 미 상원의원(공화당)이 생전에 어떻게 말하고 행동했는지 깊이 연구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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