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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재의 ‘향상일로’] 서로 도우며 잘 살기
[박영재의 ‘향상일로’] 서로 도우며 잘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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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11.28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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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재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박영재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우리는 그동안 여러 매체를 통해 솔선수범해야할 각계각층의 지도층 인사들의 갈등들, 보기를 들면 종교인들 간의 갈등, 연구비 유용을 포함한 지도교수와 대학원생간의 갈등, 여야(與野) 소통부재의 대치로 인한 정치 실종, 노사(勞使) 갈등으로 인한 국내외 경쟁력 약화 등의 답답한 기사들을 지속적으로 접해 오고 있어 그 어느 때보다도 ‘상생(相生)’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특히 어렵게 시작한 남북 정상 회담을 계기로 비핵화 및 경제협력 등을 포함해 평화정착을 위한 교류를 서두르지 말고 서로 신뢰를 차근차근 쌓아가면서, 남북 모두 함께 기본적인 인권(人權) 보장을 포함해 온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상생의 길로 접어들기를 간절히 염원(念願) 드려 봅니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서로 도우며 잘 살기[相生]’에 대해 사례들을 중심으로 다루고자 합니다.

◇ 뉴턴과 핼리의 상생

유럽 천문학자들은 16세기 무렵 당시 첨단장비의 하나였던 망원경을 이용해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한다는 관측 자료들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이 무렵 핼리는 이 자료들을 이용해 그 주기를 정확히 계산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한편 뉴턴(1642-1727)은 1667년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표하며 자연현상의 최초 수식화에 성공하며 기계론적인 세계관에도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핼리(1656-1742)가 1684년 캠브리지 대학에서 왕립협회 회원으로 함께 활동하던 뉴턴을 만나 자신이 진행하고 있는 연구의 어려움을 호소하자, 뉴턴은 ‘만유인력의 법칙을 적용하면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타원궤도를 그리며 공전한다’고 답했으며 연구노트도 즉시 보내주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핼리는 이를 이용해 1705년 <혜성에 관하여>를 출간하면서 1682년 지구를 지나갔던 혜성이 약 75년의 공전주기를 갖는 혜성[뒤에 그를 기려 핼리혜성으로 명명됨]임을 밝혔습니다. 

그런데 이를 학문의 발전적 관점에서 보면 뉴턴과 핼리는 서로 상생하며, 즉 뉴턴은 중력에 관한 법칙을 발견했고, 핼리는 이 법칙을 천체 현상에 적용해 지구의 공전 궤도와 주기를 정확히 파악함으로서 천체물리학 발전에 기여했을 뿐만이 아니라 지구와의 충돌 가능성 공포로부터 인류를 해방시켰던 것입니다. 더 나아가 부유했던 핼리는 비용을 전액 부담해 1687년 뉴턴의 불후의 명저 <프린키피아> 출판을 돕기까지 하며 물리학 발전에 크게 기여한 숨은 공로자이기도 하였습니다.

참고로 필자는 이공대 1학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일반물리학을 강의할 때면 늘 4명 정도 단위로 그룹스터디를 할 것을 적극 권장합니다. 왜냐하면 극단적으로 비유를 들면 공부 잘 하는 학생이 90%를 이해했다고 해도, 잘 모르는 10%에 대해 상대적으로 공부를 못하는 학생이 이를 정확히 이해했을 경우 둘이 함께 상생하면 둘 다 100%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필자가 시험에서 교재에 없는 응용문제를 냈을 때 성적이 좋은 학생들도 풀지 못하는 문제들을 성적이 떨어지는 학생들이 정확히 푸는 경우도 종종 보아왔습니다. 

사실 필자도 학부 때 몇몇 친구들과 그룹스터디를 통해 톡톡히 효과를 보았습니다. 또한 대학원생 시절부터 정년을 2년 앞둔 지금까지도 비록 대단한 연구는 아니지만 새로운 연구결과들을 도출하기 위해 선배와 후배 동료들과의 공동연구를 통해 서로의 장점들을 극대화하며, 교육자뿐만이 아니라 학자로서의 기본 연구활동도 꾸준히 유지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 소동파의 치열한 상생 노력

중국 송나라 제6대 신종(神宗) 황제는 즉위 직후 신법당[新法黨, 개혁당]의 중심인 왕안석(1021-1086)을 등용해 신법, 특히 이 가운데 왕안석이 지방 관리로서 기름진 지역을 다스릴 때 크게 성공을 거두었던 농민을 위한 저금리 정책인 청묘법(靑苗法)을 중국 전역으로 확대 실시하였습니다. 

그러자 사마광(1019-1086)을 정점으로 하는 구법당[보수파]이 그 취지는 좋으나 각 지역의 실정을 고려하지 않고 중국 전역에서 실시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점을 지적하며 극구 반대하였습니다. 특히 1071년 무렵 구당파에 속한 소동파(1036-1101)는 당시 실권자인 왕안석의 신법에 대해 “신(臣)이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세 가지입니다. 폐하께 원하는 것은 인심(人心)을 결속시키고 풍속을 두텁게 하고, 기강을 바로잡는 일입니다”라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가 중앙에서 밀려나 한직(閒職)인 항주(杭州)의 통판(通判)으로 좌천(左遷) 됩니다. 

그러자 책임질 부담이 없었기 때문에 주로 지인들과 교류하며 천부적 재능과 사회적 문제의식이 융합된 시들을 지었습니다. 그러다가 1079년 호주(湖州) 태수로 부임한 지 3개월 만에 신법당의 젊은 무리들이 사사건건 나름대로 옳은 견해로 제동을 거는 소동파를 제거하기 위해 작심을 하고 소동파의 시들을 이 잡듯이 뒤져 비판적인 내용들을 모아, 이를 근거로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무고(誣告)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6개월간이나 옥고를 치르게까지 하면서 사형을 시키려 했으나 신법당의 우두머리였던 왕안석이 비록 이념은 달랐지만 인재를 아끼는 마음에서 적극적으로 소동파를 구명해 유배를 보냈다는 일화는 깊이 성찰할 대목이라 사려 됩니다. 

이 사건 이후 소동파는 1081년 귀양지인 황주(黃州)에 도착해 지인의 도움으로 성 동쪽에 있는 작은 산비탈에 수십 무(畝)의 황무지를 개간해 그 땅에 농사를 지으며 생계를 꾸려 나갑니다. 이듬해 그 땅의 오른쪽 언덕 위에 동파설당(東坡雪堂)을 짓고 스스로 동파거사(東坡居士)라 칭하기 시작했는데, 그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가난했던 이 시기에 그 유명한 적벽부(赤壁賦)를 지었으며, 또한 참선 수행에도 몰입하며 깊은 통찰 체험도 하게 됩니다.


참고로 이 무렵 사대부들의 자기성찰에 크게 기여한 선종(禪宗) 가운데 임제종은 오늘날 한국과 일본을 포함해 전 세계로 퍼진 양기방회(楊岐方會, 992-1049) 선사를 개조로 하는 양기파와 황룡혜남(黃龍慧南, 1001-1089) 선사를 개조로 하는 황룡파로 새롭게 분파하며 번창했습니다. 소동파는 이 가운데 황룡파 계열의 동림상총(東林常總, 1025-1091) 선사의 제자로 “유정설법(有情說法), 즉 인간의 언어뿐만 아니라 무정설법(無情說法), 즉 자연의 언어까지 들을 줄 알아야 한다”라는 스승의 한마디[一轉語]에 콱 막혀버렸습니다. 그 후 ‘무정설법’을 화두로 삼아 참구하다가 어느 날 폭포 아래를 지나다가 이를 타파하고 지은 오도송(悟道頌)은 다음과 같습니다. 

시냇물 소리가 곧 오묘한 법문이니
 산 빛이 어찌 청정법신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밤새 설한 이 팔만사천 게송들을
 다른 날 어떻게 다른 이에게 (그대로) 들려줄 수 있으리.

[계성변시광장설溪聲便是廣長舌/ 산색기비청정신山色豈非淸淨身/
야래팔만사천게夜來八萬四千偈/ 타일여하거사인他日如何擧似人.]

그런데 필자의 견해로는 그의 이 체험이 일생 동안 귀양(歸鄕)을 가건 복직(復職)을 하건 가는 곳마다 있는 그 자리에서 온 몸을 던져 백성들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치열하게 상생의 삶을 이어간 원동력이라 확신합니다. 덧붙여 소동파는 관직에 나가면서부터 오로지 고통 받는 백성들을 편안케 하는 데에 뜻을 두었기 때문에 구법당 소속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보수와 진보가 둘이 아닌 ‘보진불이(保進不二)’의 정신으로, 사마광 앞에서 왕안석의 신법도 일부 쓸모가 있다고 지적하다 미움을 사기도 했는데, 그렇다고 철새처럼 이 당, 저 당을 옮겨 다닌 것은 아니며 항상 소신 있게 언행일치(言行一致)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 윈스턴 처칠과 알렉산더 플레밍

이번에는 금수저와 흙수저의 상생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영국의 수상까지 지낸 처칠(1874-1965)이 소년 시절 부유한 부모 밑에서 성장했는데, 한번은 부모와 함께 여름휴가를 스코틀랜드의 시골 별장으로 갔습니다. 그가 거기서 수영을 하다가 익사할 위기에 처했을 때, 부근에서 밭일을 하던 가난한 시골 소년이 이 광경을 목격하고 즉시 물에 뛰어 들어 처칠을 구해냈습니다. 처칠이 집으로 돌아와서 아버지에게 그 사실을 말하자 아버지가 내일 다시 그 소년에게 가서 소원이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시켰습니다. 그 소년에게 가서 소원을 물으니 의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처칠의 아버지는 그 소년이 의대를 졸업할 때까지 후원을 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 후 이 소년은 의학공부에 매진한 끝에 노벨의학상까지 받았는데, 이 사람이 바로 항생제인 페니실린을 발명해 무수히 많은 생명을 구한 알렉산더 플레밍(1881-1955)입니다.

그런데 처칠 수상이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소련 스탈린과 회담을 하기 위하여 소련에 갔다가 폐렴이 걸려 심한 고통 속에 죽음의 위협까지 받게 되었으나, 플레밍이 발명한 페니실린으로 다시 건강을 회복해 종전(終戰)의 주역 가운데 한 분으로 세계평화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사실 이는 참으로 희유(稀有)한 인연 사례이기는 하지만, 비단 꼭 주고받는 관계가 아니더라도 세상은 이타자리(利他自利), 즉 서로 서로 도우며 삶을 이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 상생의 첫걸음은 자기성찰

한편 우리는 선불교 수행에 기원을 둔, 존 카밧진 박사가 1979년 개발한 명상법 ‘마음챙김’이 종교를 초월해 전 세계적으로 각광받으며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기사들을 끊임없이 접해 오고 있습니다. 보기를 들면 헤럴드 썬(Herald Sun) 지가 2012년 6월 12일 다음과 같이 보도했습니다. 

“호흡과 몸을 관찰하며 과거나 미래보다 현재에 집중하는 마음 수련에 참여하며, 일상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길 희망하는 미국인들이 늘어나고 있다. 마음 챙김에서 새로운 삶의 패러다임을 찾고 있는 것이다. 민주당의 팀 라이언(Tim Ryan) 하원의원은 2012년 3월 말 출간한 <마음챙김에 기반 한 국가론(A Mindful Nation)>에서 국가의 미래 비전을 제시하고 이를 실현할 원동력으로 ‘마음챙김’에 초점을 맞춰, 워싱턴 정가 안팎의 이목을 끌고 있다. 그는 ‘분열과 대립이 난립하는 워싱턴 정치계에서 마음챙김은 그것을 누그러뜨릴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강조하는 한편 ‘마음챙김을 초등학교 정규 과목으로 삼는다면, 미국은 더욱 풍요로운 나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언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지 항상 지혜롭게 ‘역지사지(易地思之)’, 즉 처지를 바꾸어 상대의 입장에서 현안을 깊이 살피며 소통을 통해 상생하고자 힘쓴다면 요즈음 사회 문제가 되고 있는 각계각층에서 어리석은 분들이 벌이고 있는 ‘갑질’ 문제들도 대부분 자연스레 해결될 수 있으리라고 판단됩니다. 

참고로 기계론적 세계관에 크게 기여한 베이컨(1561-1626)은 심리학 분야에서 자주 인용하는 지식인들의 ‘확증편향(確證偏向)’ 경향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피력하였습니다.

“지식인은 일단 어떤 견해를 갖게 되면 이를 뒷받침할 만한 자료들을 가능한 많이 수집한다. 그런 다음 이 과정에서 반대되는 중요한 증거들이 적지 않게 드러나도 이를 모른 척하거나 폄하하면서 자신의 견해가 보편타당한 진리처럼 고수하려한다.”

한편 이에 반해 하루하루 ‘좌일주칠(坐一走七)’한다면, 즉 ‘이른 아침 잠깐 앉은 힘’[자기성찰]으로 함께 더불어 온몸을 던져 맡은 바 책무에 몰입하려 힘쓴다면, 역지사지하며 상대의 견해를 깊이 살피며 상생하려는 지혜로운 태도는 저절로 발휘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한국을 이끌고 있는 각계각층의 지도자 분들도 자기성찰로 하루를 시작하며, 부디 서로 견해는 다를지라도 고통 받는 국민들의 삶을 편안케 하는데 초점을 맞추어, 열린 마음으로 함께 머리를 맞대고 허심탄회하게 서로 다른 견해들의 장단점을 정확히 파악한 후, 상대의 견해가 더 좋다고 판단되면 상생의 지혜를 발휘해 큰 틀에서 기꺼이 이를 채택하고, 세부적인 문제점들은 드러날 때마다 하나하나 보완해 가면서 실천해 옮기기를 간절히 염원해 봅니다. 사실 이럴 경우 대한민국은 하루하루 향상의 길을 걸으며 오늘보다 나은 내일이 될 수 있기에 이를 반기지 않을 국민은 아무도 없겠지요. 
 

박영재 교수는 서강대에서 학사, 석사, 박사(전공분야: 입자이론물리학) 학위를 받았다. 1983년 3월부터 강원대 물리학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1989년 9월부터 서강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서강대 물리학과장, 교무처장, 자연과학부 학장을 역임했다.
한편 1975년 10월 임제종 양기파의 법맥을 이은 선도회 초대 지도법사이셨던 종달 선사 문하로 입문한 박 교수는 1987년 9월 스승이 제시한 간화선 입실점검 과정을 모두 마쳤다. 1990년 6월 종달 선사 입적 이후 지금까지 선도회(2009년 사단법인 선도성찰나눔실천회로 새롭게 발족) 지도법사를 맡고 있다. 한편 1991년 8월과 1997년 1월 화계사에서 숭산 선사께 두 차례 입실 점검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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