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필자: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시사위크] 닷새 동안 제주 올레길을 걷고 왔네. 제주도의 계절은 벌써 봄이더군. 가장 추운 날 아침 기온도 영하로 내려간 적이 없었고 일평균기온이 10도를 오르내렸으니 봄이라고 불러도 틀린 말은 아니겠지. 바람이 없는 돌담길을 걸을 때는 얼굴과 등이 땀에 흠뻑 젖을 정도로 따뜻한 봄날의 연속이었네. 그래서 추운지 모르고 봄꽃 향기 맡으며 걷고 또 걸을 수 있었지. 봄에 취해 다리 아픈 줄도 모르고 하루 평균 20km 이상 걸었으니 우리 나이에 대단한 것 아닌가? ‘걷는 음유시인’이라 일컫는 프랑스의 동식물학자 이브 파칼레의 말처럼, 걷기는 ‘감미롭고 위험하지 않은, 중독되지 않으면서 쾌감’을 주는 마약임을 다시 한 번 실감한 제주올레길 나들이였네. 

올레길이 지나는 길옆에 있는 공원마다 매화가 만발하여 그윽한 향기를 내뿜고 있었네. 서울에서는 한 달 정도 더 기다려야 맡을 수 있는 향기라고 생각하니 그냥 지나칠 수 없더군. 매실나무 밑에 앉아 계속 깊은 숨을 들이마실 수밖에. 꽃향기 또한 걷기처럼 감미로운 쾌감을 안겨주는 마약임이 확실해. 맡고 또 맡아도 전혀 지겹지 않았네. 기분이 좋으니 김용택 시인의 <봄날>이 입에서 저절로 나오더군. “나/ 찾다가/ 텃밭에/ 흙 묻은 호미만 있거든/ 예쁜 여자랑 손잡고/ 제주도 봄바람 따라/ 매화꽃 보러 간줄 알그라.” 물론 여기서 ‘제주도 봄바람’은 ‘섬진강 봄물’을 내가 바꾼 걸세.  

식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네 개의 코스를 걷는 동안 많은 꽃들과 열매들이 반갑게 맞아주더군. 대단한 환대였네.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바람결에 맞춰 춤을 추는 유채꽃 무리들, 골목 돌담길에서 다소곳이 고개 숙여 서로 인사를 나누던 하얀 수선화 꽃들, 겨우내 이고 있던 열매들을 이름 모를 새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어 주고 있는 먼나무와 먹구슬나무, 뚝 뚝 붉은 꽃봉오리를 땅으로 돌려보내고 있는 동백나무, 무슨 미련 때문인지 모르지만 아직 한 해를 마무리하지 못하고 있는 보라색 해국 꽃들, 새봄이 왔음을 알리는 영춘화와 복수초의 노란색 꽃들,  광대나물, 큰개불알풀, 자주개불주머니, 왜제비꽃, 냉이 등의 풀꽃들. 제주도에 사는 모든 식물들이 다 나와 열렬히 환영해 주더군. 얼마나 고마운지. 식물을 좀 아는 자만이 느낄 수 있는 행복한 올레길 걷기였네. 

올레길 길섶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의 따뜻한 눈길을 기다리고 있는 많은 봄꽃들을 보니 궁금해지더군. 다른 사람들도 꽃과 열매를 만나면 가던 길을 멈추고 서로 인사를 나눌까? 그냥 지나치는 분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곽재구 시인의 <봄 편지> 일부일세. “아시오?/ 바람의 밥이 꽃향기라는 것을/ 밥을 든든히 먹은 바람이/ 새들을 힘차게 허공 속에 띄운다는 것을/ 새들의 싱싱한 노래 속에/ 꽃향기가 서 말은 들어있다는 것을”

내가 꽃을 좋아한다는 말은 여러 번 언급했지? 꽃을 좋아하면 자연히 걷는 것도 좋아하게 되네. 집에만 있으면 많은 꽃들을 볼 수 없으니 자주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거든. 그래서 꽃구경과 걷기는 함께 해야만 하는 마약일세. 물론 감미롭지만 위험하지는 않는,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쉽게 시작할 수 있는 마약이야. 길을 걸으면서 꽃들과 놀다보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가벼워지네. 세속적인 욕망들을 비우고 버리니 가벼워질 수밖에. 이번 올레길 걷기에서도 비움의 행복을 만끽할 수 있었네. 작은 것에 만족할 줄 알면 삶이 오히려 풍요로워진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고나 할까.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知足不辱), (적당할 때) 그칠 줄 아는 사람은 위태로움을 당하지 않는다(知止不殆). 그리하여 영원한 삶을 살게 된다(可以長久).”“화로 말하면 족할 줄 모르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고(禍莫大於不知足), 허물로 치면 갖고자 하는 욕심보다 더 큰 것이 없다(咎莫大於慾得). 그러므로 족할 줄 아는 데서 얻는 만족감이 영원한 만족감이다(故知足之足, 常足矣).” 노자의 《도덕경》에 반복해서 나오는 가르침들일세.

자주 하는 말이지만 행복해지려면 버리고 또 버려야 하네. 버리는 것에는 끝이 없네. '지족(知足)'이면 편해지는데, 그칠 줄 알면 영원히 살 수 있는데, 우리는 왜 노년이 되어도 더 가지려고 애를 쓰고 있는지… 버릴수록 풍만해지는 역설. 이번 제주 올레길을 걸으면서 묻고 또 물었던 화두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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