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도척(盜跖)의 부하가 물었다. “도둑질에도 도(道)가 있습니까?” 도척이 대답했다. “어딜 가더라도 도(道)가 없는 데가 어찌 있을 수 있겠는가! 방안에 감춰진 걸 짐작으로 헤아려서 맞히는 건 총명함(聖)이고, 들어갈 때 선두에 서는 건 용감함(勇)이고, 나올 때 후미에 있는 건 의로움(義)이고, 훔칠 수 있는지 여부를 아는 건 지혜로움(知)이고, 훔칠 걸 공평히 나누는 건 어짊(仁)이다. 이 다섯 가지를 갖추지 않고 천하에 큰 도둑이 된 자는 아직 없다.”

‘장자’외편 ‘거협’에 나오는 전설적인 큰 도적 도척의 말일세. 큰 도적이 되려면 총명하고, 용감하고, 의롭고, 지혜롭고, 인자해야 한다니 씁쓸한 독설 아닌가. 장자는 도척의 말을 통해 이른바 많이 배웠다는 사람들을 비꼬고 있네. 순박한 백성들을 교활한 말로 속여 타고난 선한 본성을 잃게 만드는 사람들이 지식인이라는 거야. 맞는 말 아닌가.

비례정당 없이 선거를 치르면 미래통합당이 제1당이 되니 더불어민주당도 위성정당을 만들어야 한다는 논리를 제공한 사람들이 누구이겠나? 사실 이번 준연동형비례대표제에서 연동이 걸린 30석을 나누는 방식은 보통사람들에게는 쉬운 산수가 아니네. 진보진영이 전멸하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여 만든 시나리오에 따라 비례정당 창당 당위성을 말하는 사람들은 많이 배운 ‘지혜로운’ 사람들일세. 장자는 자기 이익에 따라 얄팍한 꾀를 내고 다양한 명분을 만들어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는 걸 ‘지혜’라고 하네. 바로 그런 지혜가 세상을 혼탁하게 만든다고 보지. 그래서 장자는 성인(聖人)이 총명함을 끊고 지혜를 버려야 큰 도둑이 사라진다고 말하네. 장자의 말처럼 어느 시대나 많이 배운 자들이 큰 도적일세. 얄팍한 꼼수로 정치를 희화화하면서도 현란한 말로 자신들의 위선적인 행위를 정당화하고 있는 지식인들은 부끄러워해야 하네.

승자독식의 소선거제로 인한 사표를 방지하고, 득표율에 따른 의석 분포로 시민들의 정치참여를 극대화하고, 사회경제적 불평등, 평화, 생태, 다문화가정, 여성, 청소년, 청년, 노인 등 지금 우리 사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주요 이슈들을 국회라는 정치의 장으로 끌어들여 우리도 선진 정치를 해보자는 게 선거제도 개혁의 목적 아니었나? 수구야당과 보수언론의 격렬한 저항을 힘겹게 물리치고 어렵게 만든 준연동형비례대표제의 취지를 스스로 무력화시키는 거대 여당의 횡포를 보면서 다시 한 번 정치에 대한 환멸을 느낀 사람이 어디 나 뿐일까?

이 칼럼에서 몇 번 언급했지만, 우리나라에서 진보세력의 터줏대감처럼 행동하는 더불어민주당은 국제 기준으로 보면 미국 민주당보다 더 오른쪽에 있는 중도보수정당일 뿐일세. 수구세력들이 주축인 미래통합당보다 약간 더 왼쪽에 있어서 겉모습만 진보정당인 것처럼 보일 뿐이야. 실제로 남북관계에 대한 좀 전향적인 입장을 빼면 미래통합당과 더불어민주당의 차이는 거의 없네. 두 정당 모두 우리 사회의 20% 기득권 세력의 이익을 대변하는 보수정당일 뿐이야. 우리 사회 구성원 80%를 차지하고 있는 노동자, 농민, 여성, 장애인, 노인, 이주민, 성소수자 등 사회경제적으로 소외된 자들을 대변하는 정당은 아직 없거나, 있어도 정의당처럼 국회교섭단체도 만들지 못하는 소수정당에 불과하네. 그래서 작년에 국회를 난장판으로 만든 동물국회 논란까지 일으키며 어렵게 마련했던 게 연동형비례대표제도 아닌 정당투표 연동률 50%, 그것도 30석에만 적용하는 ‘준’연동형비례대표제야. 그것마저도 더불어민주당이 대통령을 지키겠다고 무력화시키고 있으니 참담할 뿐일세.

더불어민주당 대표라는 분이 비례연합정당에 참여하면서 “당 대표로서 국민께 이런 탈법과 반칙을 미리 막지 못하고 부끄러운 정치 모습을 보이게 돼 매우 참담하고 송구하다는 깊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했더군. 그분이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서 야당 국회의원을 할 때는 꽤 진보적이고 패기가 넘쳤던 분이었는데… 권력에 대한 장자적 의미의 지혜를 가진 후로는 노회한 정치꾼으로 변해 도척이 된 것 같아 보기 민망하네. 비례연합정당을 만드는 게 부끄러운 일인지 알면 하지 말아야지. 그렇게 맞대응하지 않고도 선거에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이 아닌데 그게 힘들다고 더 후안무치한 미래통합당이 먼저 시작한 위성비례정당으로 응수하다니… 이런 두 거대정당이 지배하는 나라에서 앞으로 얼마나 더 살아야 할지 암담하네.

위성비례정당이 떳떳하지 못하는 걸 알면서도 이번 기회를 이용해 국회에 진출하겠다고 따라가는 이른바 진보정당들의 행동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런 편법으로 국회에 진출하는 그들의 오랜 꿈이 실현된다고 해서 자생정당이 될 수 있을까? 난 아니라고 보네. 스스로 자립하지 못한 기회주의 정당들이 오래 가는 경우는 거의 없거든. 힘들고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스스로 국민들을 설득하는 과정을 거쳐야지 뿌리 깊은 정당이 될 수 있어. 오히려 이런 편법에 편승한 게 두고두고 당의 확장성을 제약하는 짐이 될 수도 있거든. 정말로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을 대변하는 정당이 되고 싶거나, 아직 국민들의 관심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는 생태나 여성 등의 이슈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진보정당이라면, 바닥에서부터 차근차근 지지기반을 쌓아가는 게 옳네. 알묘조장(揠苗助長)이라고 했나. 논에서 자라는 벼의 성장 속도가 늦다고 이제 막 싹이 트기 시작한 모를 쏙쏙 뽑아 올리면 벼들은 죽을 수밖에 없어. 지난 몇 년 동안 느리지만 꽤 내실 있게 성장을 해 온 진보정당들이 더불어민주당의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지 않길 바랄 뿐이네.

앞에서 인용한 ‘장자’ 거협편의 마지막 부분일세. “지혜로움을 좋아하다보니 세상이 혼란에 빠져버렸다. 하, 은, 주 삼대 이후 이런 꼴이다. 세상이 소박하고 순수한 사람들을 무시하고, 교활하게 말만 잘하는 사람들만 반긴다. 담박하게 꾸밈없는 것은 싫어하고 의미 없는 수다들만 좋아한다. 요란한 수레소리로 세상이 시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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