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며칠 전 강원도 시골길을 걷다가 배추밭에서 심란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노부부를 만났네.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얼마 전에 싹을 틔운 배추 잎에 여기저기 구멍이 많이 났다고, 식구들이 먹을 거라 농약을 하고 싶지 않는데 벌레가 생긴 것 같아서 걱정이라고 심각하게 대답하더군. 은퇴 후에 시골에 내려와 그냥 있기 적적해서 채소라도 직접 길러 먹고 싶어 시작했는데 농사에는 초보라 쉽지 않다고 푸념하는 노부부에게 나희덕 시인의 시 <배추의 마음>을 들려주었네.

배추에게도 마음이 있나보다./ 씨앗 뿌리고 농약 없이 키우려니/ 하도 자라지 않아/ 가을이 되어도 헛일일 것 같더니/ 여름내 밭둑 지나며 잊지 않았던 말/ - 나는 너희로 하여 기쁠 것 같아./ - 잘 자라 기쁠 것 같아.// 늦가을 배추포기 묶어주며 보니/ 그래도 튼실하게 자라 속이 꽤 찼다./ - 혹시 배추벌레 한 마리/ 이 속에 갇혀 나오지 못하면 어떡하지?/ 꼭 동여매지도 못하는 사람 마음이나/ 배추벌레에게 반 넘어 먹히고도/ 속은 점점 순결한 잎으로 차오르는/ 배추의 마음이 뭐가 다를까./ 배추 풀물이 사람 소매에도 들었나보다.

배추 같은 식물에도 마음이 있다고 믿고 날마다 배추들 옆에 앉아 저 시인처럼 우리는 “너희로 하여 기쁠 것 같아. 잘 자라 기쁠 것 같아”라고 말하면 아마 배추도 자신을 좋아하는 두 분을 위해 튼튼하게 잘 자랄 거라고 위로해주고 왔어. 나도 농약 없이 집 옥상에서 채소 잘 길러 먹고 사는 도시농부라고 자랑도 했고.

난 정말로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은 마음을 갖고 있다고 믿네. 그래서 길을 가다가 좋아하는 꽃을 보면 일부러 가까이 다가가 말을 걸지. 내가 먼저 ‘안녕~ 오랜만이야!’라고 인사하면 꽃들도 좋아하는 모습이 보여. 집에서 옥상에 농사 지으면서 병이 들거나 잘 자라지 않는 식물이 있으면 그 옆에 앉아 ‘네가 무럭무럭 자라는 모습을 보면 기쁠 거야’하고 속삭여주지. 마치 좋아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고백하듯이… 그러면 아프던 식물이 거짓말처럼 나아서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경우도 많아. 배추, 무, 가지, 고추, 들깨, 대파 같은 채소들도 농약 치지 않아도 잘 자라고.

시골에서 자라서 그랬는지 몰라도 난 어렸을 때에도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속담을 곧이곧대로 믿었네. 실제로 낮에는 새가 많고 밤에는 쥐가 많은 시절이었으니 그들이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의 말을 알아듣는다는 게 그렇게 놀라운 일이 아니었지. 백무산 시인이 <사람의 말>에서 말했던 것처럼 “그땐 미물도 사람 말을 알아들었다/ 네발 달린 것들에겐 존대하는 것도 예사였다/ 낮말은 나무가 듣고 밤말은 도깨비가 들었다/ 산을 보고도 보름달을 보고도 간곡했다/ 저승길에도 사자들과 열시왕에게/ 제물 올리고 읍소하고 굽신거렸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학교에 다니면서 사람이 아닌 다른 생명체가 사람 말을 알아들을 수 없다는 걸 배웠지. 나무가 사람 말을 알아듣는다고 믿는 미신은 ‘새마을’을 위해 타파되어야 한다면서 많은 당산나무들이 사라진 것도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야. 그때부터 난 학교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한 어머니와 할머니와는 완전히 다른 종이 되어버렸지. 다른 생명들과 인간이 서로 소통한다고 어렸을 때 어머니로부터 배웠던 믿음은 완전히 사라지고 합리적인 것만 받아들이는 영혼 없는 인간이 되어버렸던 거야.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50살이 넘어 우연히 야생화를 좋아하게 되면서 다시 식물들과 그 주위에 사는 다른 미물들에게 자꾸 말을 걸게 되었어. 지금은 어렸을 때처럼 모든 생명체들은 다 마음을 갖고 있고, 만물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고 믿고 있네.

지난 8월 9일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협의체(IPCC)’가 제6차보고서를 발표했네. 지구표면의 평균 기온이 산업혁명 이전보다 1.1℃ 상승했고, 바다 수위는 지난 50년간 최고 25cm 상승했으며, 지난 300만년 동안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가 이렇게 높은 적이 없었다는 게 이번 보고서의 핵심 요지였네. 그러면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지구온난화가 인간 활동에 의한 것이 명백하다”고 선언했더군. 인간이 지구온난화의 범인이라는 뜻이지.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 우주 만물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고,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은 마음을 갖고 있음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시적·생태적 감수성을 되찾지 않고서는 기후위기는 점점 심각해질 수밖에 없을 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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