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이성민이 영화 ‘리멤버’(감독 이일형)로 돌아왔다.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배우 이성민이 영화 ‘리멤버’(감독 이일형)로 돌아왔다.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시사위크=이영실 기자  “기억을 잃어도 내가 배우였음은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1985년 연극을 시작으로 영화와 드라마, 무대를 넘나들며 다양한 캐릭터로 대중과 만나온 배우 이성민은 여전히 뜨거웠다. 나이가 들어 행여 기억을 잃게 되더라도 ‘배우’라는 직업, ‘연기’라는 일은 잊고 싶지 않다며 ‘천상 배우’다운 바람을 전했다.  

오는 26일 개봉하는 영화 ‘리멤버’(감독 이일형)도 그의 뜨거운 열정으로 빚어진 작품이다. 가족을 모두 죽게 만든 친일파를 찾아 60년간 계획한 복수를 감행하는 알츠하이머 환자 필주(이성민 분)와 의도치 않게 그의 복수에 휘말리게 된 20대 절친 인규(남주혁 분)의 이야기를 담은 ‘리멤버’에서 이성민은 80대 알츠하이머 환자로 분해 또 한 번 쉽지 않은 도전을 마쳤다.  

이성민이 연기한 80대 노인 필주는 기억이 사라지기 전 가족을 앗아간 친일파들에게 60년을 계획한 복수를 완성하려는 인물이다. 이성민은 첫 등장부터 80대 노인 필주 그 자체로 존재하며 탄탄한 연기 내공을 입증한다. 말투부터 걸음걸이, 움직임 하나까지 디테일하게 표현해 감탄을 자아낸다. 특유의 인간미 넘치고 따뜻한 얼굴부터 서늘하고 섬뜩한 눈빛까지, 폭넓게 소화하며 독보적인 존재감을 뽐낸다.

이성민은 최근 <시사위크>와 만나 ‘리멤버’를 택한 이유부터 캐릭터 구축 과정, 촬영 비하인드 등 다양한 이야기를 전했다. 매 작품 도전을 멈추지 않는 그는 “부족함을 느끼고 채우는 과정이 계속해서 나아갈 수 있는 동력”이라고도 했다. 

또 한 번 새로운 얼굴을 보여준 이성민.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또 한 번 새로운 얼굴을 보여준 이성민.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2020년 2월 크랭크업한 뒤 드디어 개봉하게 됐다. 기분이 어떤가. 
“늘 그렇지만, 긴장되고 예민해지고 후회도 있고 그렇다. 영화를 보고 나서는 행복했다. 개인적으로 굉장히 만족하게 잘 나왔다. 관객들이 어떤 평가를 해줄지 모르겠지만 잘 봐주셨으면 하는 마음이다.”

-가장 만족스러웠던 지점은.  
“필주는 그럴 법한 인물이다. 그 시대에 살았고, 온 가족을 잃어버렸다. 다만 현시대 관객들에게 공감을 어떻게 줄 것인가 우려가 됐다. 관객들이 영화를 보고 ‘또 이런 영화야?’라고 할까 봐 걱정도 됐다. 그 지점에서 인규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필주에게 끌려가고 때로는 그를 이해하는 과정에서의 인규의 시선이 젊은 관객들의 눈높이가 아닐까 생각했고, 젊은 친구들이 보편적으로 느끼는 감정과 생각을 하는 인물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을 (남)주혁이 잘 해준 것 같다. 키도 크고 잘생긴 배우가 평범함을 잘 연기해 줬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참 고생했구나 싶더라.”

-80대 노인의 외적인 부분부터 움직임까지 디테일하게 표현했다. 어떤 고민을 했나. 
“제일 부담스러운 부분이었다. 그중에서도 외모가 가장 걱정됐다. 얼마나 자연스러울지 보다 선생님들과 같이 연기했을 때 어색하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가장 힘들었던 부분이다. 필주의 얼굴을 만들어내기까지 준비부터 테스트 과정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게 첫 번째였고, 그다음은 내가 그 얼굴을 하고 얼마나 노인처럼 행동하느나였다. 내가 어떻게 했는지 잘 모르겠다. 연기라는 게 노트에 적어가면서 공식처럼 하는 게 아니다 보니, 이 작품을 하겠다고 결정한 다음부터 그냥 일상 속에서 변화가 생겼던 것 같다. 자세라든가 걸음걸이라든가 문득문득 생각날 때마다 나 스스로 테스트를 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 나름대로 습득한 것 같다. 목소리는 의도적으로 목을 눌러서 만들었고 호흡을 긁어가면서 소리를 냈다. 후유증도 있었다. 촬영 중반부터는 목 디스크기 왔고 그 상태로 촬영했다.” 

-액션도 다르게 접근해야 했다고. 
“그렇게 힘든 액션 콘티는 아니었다. 몸싸움을 하고 그러는 거였는데, 리허설을 하는 과정에서 무술팀이 했는데 너무 빨랐던 거다. 감독이 고령의 노인들이 이렇게 싸우진 않을 것 같다고 했고 그렇게 수정을 하다 보니 처음 예상했던 속도보다 절반 이상 느리게 움직임을 해야 했다. 그게 많이 힘들었다. 그냥 팍팍하면 쉬운데 저속으로 해야 하니 더 어렵더라. 무술팀이 지금까지 자기가 한 액션 중에 가장 힘들다고 말했을 정도다. 박병호(토조 히사시 역) 선생님은 부상이 있었는데 촬영이 끝날 때까지 말씀도 안 하고 참고 하셨다더라. 끝나고 나서 알았다. 대단하셨다. 옛날에 액션영화를 많이 하셨다고 하더라. 액션을 너무 잘하셨다.” 

80대 노인 필주를 완벽히 표현해낸 이성민.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80대 노인 필주를 완벽히 표현해낸 이성민.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그동안 정말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해왔지만, 필주는 또 다른 큰 도전이었다. 어떤 배움과 깨달음이 있었나.  
“배우를 계속하고 있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어릴 때는 배우 생활이 너무 힘드니까 주변에서 이 일을 왜 하냐고 물었을 때 대답을 하지 못했다. 나도 내가 왜 이 일을 하는지 몰랐다. 언젠가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야지 생각했던 것 같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이 일을 계속하는 이유 중 하나가 생기더라. 나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함. 조금 더 잘하기 위해, 나에게 놓인 여러 숙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였다. 노역도 그랬다. 그래서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모르겠지만 도전해볼 만하다고 생각했고, 잘 할 수 있을 때까지 해보자는 기대가 있었다. 매 작품 부족함을 느낀다. 그리고 그 느낀 부족함을 다음 작품에서 채워나가려고 한다. 그게 내가 계속해서 나아갈 수밖에 없는 동기인 것 같다. 그렇게 계속 해내가다 죽을 것 같다.(웃음)”

-배우로서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에 대한 생각은 어떤가. 필주도 그렇고 소화할 수 있는 캐릭터의 영역이 더 넓어지는 것에 대한 기대감도 있을 것 같은데. 
“너무 애 같았을 때가 있었다. 어떤 역할을 맡기엔 너무 청년이거나 애 같은. 그럴 때는 젊은 게 오히려 별로였다. 배우가 어떤 역할이든 다양하게 수용할 수 있는 나이는 30대 중반인 것 같다. 어느 날 내가 그 나이가 돼서 그 역할을 하고 있었고 지금은 50세가 넘어 80대 역할을 하게 됐다. 이제 또 역할이 제한적이겠구나 생각도 든다. 언젠가는 선생님들이 하시는 역할을 내가 할 때가 다가오겠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믿고 보는 배우 이성민.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믿고 보는 배우 이성민.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만약 필주처럼 기억을 잃게 된다면 꼭 기억하고 싶은 순간이나 존재가 있나.  
“우리 가족들도 있지만, 내가 배우였다는 것, 배우였음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이 영화를 찍을 때 친구 어머니가 치매로 요양병원에 계셔서 같이 병문안을 간 적이 있다. 그 친구네 집에 자주 놀러 가서 밥도 많이 얻어먹었다. 총명한 분이었는데 전혀 기억을 못하시더라. 참 많이 안타까웠다. 만약 내가 기억을 잃더라도 배우였음은 기억해 냈으면 좋겠다.”

-남주혁과의 ‘케미스트리’도 좋았다. ‘브로맨스’ 전문 배우로 꼽히기도 하는데, 좋은 호흡을 완성하기 위해 선배로서 노력하는 게 있다면. 
“로맨스를 해야 하는데, ‘브로맨스’만 하고 있다.(웃음) 처음 연기를 시작했을 때 무대 위에서 하지 말아야 할 것부터 배웠다. 선배가 해야 할 게 있고, 후배가 해야 할 게 있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서 돌아보니 굉장히 쓸데없는 것 같더라. 나이가 들어서 선생님을 만났는데, ‘하고 싶은 대로 해’라고 하는 거다. 그게 맞다 생각한다. 내가 상대하는 배우가 나보다 동생이든 10살이 많든 20살이 많든, 내가 하고 싶은 것, 이 배우가 하고 싶은 충동대로 표현하는 게 맞고 존중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더 좋은 장면이 나온다. 그러려면 서로의 벽이 없어야 하고 그런 태도로 연기하려고 한다. 그런 지점이 좋은 앙상블이 생기는 데 도움을 주지 않았을까 싶다.” 

-이 영화가 관객들에게 어떻게 다가갔으면 하나. 
“필주는 눈앞에서 아버지가 매를 맞아 돌아가셨다. 형은 강제징용으로 죽고, 누나는 위안부로 끌려갔다 돌아와 목숨을 끊었다. 그걸 목격한 어린아이가 어른이 됐다. 필주의 입장에서 행하는 일들이 옳고 그름은 관객들 각자가 생각해야 할 일이다. 다만 이 영화가 매력적인 것은 그 시대를 겪은 할아버지와 그 시대와 동떨어져 사는 젊은이가 동행한다는 거다. 우리 세상도 그랬으면 좋겠다.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가 어우러져 존중하고, 포용하고 공유하는 세대가 됐으면 좋겠다. 필주와 인규처럼 동행할 수 있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다.”

저작권자 © 시사위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