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정해진 시간 내에 꼭 끝내야 할 일도 없는데 괜히 마음이 바쁜 날이 있네. 그런 날이면 무엇에 쫓기는 사람처럼 허둥대다가 아무 것도 못 하고 하루를 보내고 말지. 이제 시간 여유를 갖고 지난 삶을 조용히 뒤돌아볼 나이인데도 왜 마음은 여전히 급하기만 하는지… 이럴 때 일부러 찾아 읽는 시가 정일근 시인의 <치타슬로>이네. 치타슬로(Cittaslow)는 이탈리아어로 ‘느리게 사는 도시’라는 뜻이야.

“달팽이와 함께 느릿느릿 사는 사람의 마을에/ 개별꽃 곁에 키 작은 서점을 내고 싶다/ 낡은 시집 몇 권이 전부인 백양나무 책장에서/ 당나귀가 어쩌다 시 한 편 읽고 가든 말든/ 염소가 시 한 편 찍어서 먹고 가든 말든.”

이 시를 읽을 때마다 ‘달팽이와 함께 느릿느릿 사는 사람의 마을’이 어디에 있을까 생각하게 되네. 아직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비닐하우스도 없었던 예전의 우리 농촌과 산골 마을들이 바로 저 ‘치타슬로’가 아니었을까. 물질적으로는 풍족하지 않았지만 거의 모든 사람들이 소욕지족하며 자연의 속도에 맞춰 느긋하게 살았던 때가 그때였거든. 늦가을과 겨울이면 밤이 무척 길어서 잠도 충분히 잤지. 공부하라는 어른들의 잔소리도 없었고. 물론 요즘 자주 듣는‘빨리빨리’라는 말도 없었어. 그땐 가족들과 마을 사람들 얼굴만 마주보고 앉아 있어도 그냥 편안하고 행복했던 시절이었네.

하지만 도시화와 산업화, 정보화가 급격하게 이루어지면서 지금 우리는 아주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네. 매우 빠른 속도로 변하는 세계에 적응하느라 모두 다 바쁘게 살게 되었지. 지하철 환승할 때 보면 걷는 사람은 별로 없고 남녀노소 예외 없이 거의 모두 달리네. 자동계단(에스컬레이터)에서도 차분하게 서 있지 못하고 걸어 올라가는 사람들이 더 많아. 서울 사람들이 이동하는 모습을 카메라로 기록해 동영상으로 보면 아마 채플린의 영화보다 더 많은 웃음이 나올 걸세. 왜 저렇게 사는지 모르겠다며 한숨 짓는 사람도 있을 거야. 우리나라에 와서 일하는 외국인 근로자들이 제일 먼저 배우는 말이 ‘빨리 빨리’라는 걸 보면 전 국민이 속도감에 중독된 것 같네. 그러니 좁은 나라에 고속도로도 많고, 고속철도도 계속 늘어날 수밖에. 그것도 부족해 지방 도시 여기저기에 공항을 새로 만들거나 확장한다고 산을 깎고 바다를 메우고 있으니…

조선 후기에 서울에 살았던 양반 유만주(兪晩柱)가 쓴 일기 《흠영(欽英)》의 한 구절일세(정민의 《조심》에서 재인용). “일이 없으면 하루가 마치 일 년 같다. 이로써 일이 있게 되면 백년이 일 년 같은 줄을 알겠다. 마음이 고요하면 티끌세상(紅塵)이 바로 푸른 산속(碧山)이다. 이로써 마음이 고요하지 않으면 푸른 산속에 살아도 티끌세상과 한가지일 줄을 알겠다. 하루를 일 년처럼 살고 티끌세상에 살면서 푸른 산속처럼 보낸다면, 이것이야말로 장생불사의 신선일 것이다.”

우리도 이제 국민들의 행복감을 선진국 수준으로 높이기 위해 거의 모든 국민들의 삶의 속도를 현재의 절반 이하로 낮춰야 할 때가 되었네. 성장을 위한 가속기보다는 안전을 위해 브레이크를 세게 밟아야 할 때가 된 거야. 그래야 하루를 일 년처럼 살 수 있는 마음의 여유, 느림의 여유가 생기지. 티끌세상에 살아도 푸른 산속에 살고 있는 것처럼 마음이 고요해지는 시간을 가질 수도 있고. 이제는 “인간의 모든 불행은 단 한 가지, 고요한 방에 들어앉아 휴식할 줄 모른다는 데서 비롯한다”는 파스칼의 말을 가슴에 새기면서 살아야 할 때야. 누구보다도 살아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우리 같은 노인들이 깊이 새겨들어야 할 충고일세. 현대 문명의 미친 질주에 동승하기 위해 저항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휴대폰의 노예가 되어버린 우리 노인들 아닌가. 이제는 싫든 좋든 서서히 속도를 늦추고 멈춰 설 준비를 해야 할 때야.

“속도를 늦추었다/ 세상이 넓어졌다// 속도를 더 늦추었다/ 세상이 더 넓어졌다// 아예 서 버렸다/ 세상이 환해졌다.” 유자효의 <속도>라는 짧은 시네. 지금 당장 앞만 보고 가던 길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게나. 하늘과 구름, 꽃과 나무, 달과 별들이 보일 거야. 아예 멈춰 서서 걸어왔던 길을 뒤돌아보면 자네의 한 평생이 주마등처럼 펼쳐질 때도 있고. 속도를 늦추거나 멈춰 서면 세상이 생각보다 훨씬 넓고 환하다는 걸 알게 될 걸세. 그렇게 여유 있고 행복한 느린 노년을 만들어 가길 바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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