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몇 년 전 국가가 인정하는 노인이 된 후 아침마다 거울을 보며, 읊조리듯 조용조용, 나에게 말하는 아홉 글자가 있네. 사서삼경 중 하나인 『대학(大學)』의 <본론> 2장에 나오는 ‘구일신(苟日新) 일일신(日日新) 우일신(又日新)’인데, ‘진실로 하루가 새로웠다면, 나날이 새롭게 하고, 또 날로 새롭게 하라’는 뜻이야. 고대 중국의 은(殷)나라 탕왕(湯王)이 목욕 그릇에 새겨놓고 날마다 스스로 경계했던 말이라고 하네. 날마다 몸에 낀 더러운 때를 물로 씻듯, 날마다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하면서 마음까지 깨끗하게 닦아 새롭게 태어나기를 계속했다는 거지.

나 역시 탕왕처럼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말한 ‘인간말종’으로 생을 마감하지 싶지 않아서 나름 많은 노력을 하고 있네. 흔히 초인으로 변역되는 ‘위버멘쉬’의 반대 개념인 ‘인간말종’은 자신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없는 존재, 자신에 대해 회의를 하지 못하는 존재야. 니체는 그들을 대지에 기생하는 벼룩이라고 경멸하지. 반면 위버멘쉬는 ‘힘에의 의지’를 바탕으로 자기극복을 위해 기존의 모든 관습과 굴레를 벗어던지고 ‘나답게 사는’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이며 창조자야. “나는 그대들에게 위버멘쉬를 가르치노라. 사람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사람을 넘어서기 위해 그대들은 무엇을 했는가?”라고 묻는 차라투스트라에게 ‘나 이렇게 애쓰고 있소’라고 당당하게 대답하고 싶으니 날마다 ‘구일신 일일신 우일신’을 주문처럼 읊조릴 수밖에.

​칠순을 앞두고 있는 우리에게 노년기는 부모님 세대처럼 짧은 기간이 아니네. 우리는 운이 좋으면 앞으로도 20~30년 더 건강하게 살 수 있는 노인들이지. 그래서 우리 세대에게 노년기는 젊었을 때 꿈꿨지만, ‘생산력’과 ‘이윤’을 중시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한 톱니로 밥 먹고 사느라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던, 자신만의 삶을 다시 시도해 볼 수 있는 시기야. 우리 노년이 신체적 무력감과 사회적 고립 속에서 투명인간처럼 우울하게 살다 갈 인생 말년이 아니고, 다시 한 번 청춘처럼 가슴이 뛰는 삶, 남들과는 다른 나만의 삶을 시도해 볼 수 있는 생의 마지막 전환점이라는 말일세.

물론 ‘내가 원하는 나’로 살기 위해서는 많은 용기와 끈기가 필요하네. 무엇보다도 먼저 익숙한 것들과 헤어져야 해. 지금까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던 것들, 지금까지 나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것들과 과감하게 결별하고 새로운 것들을 찾아나서야 하고. 그렇게 해야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게 뭔지도 알게 되거든. 지금 우리 세대 노인들이 너무 늦었다거나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낯선 세계로의 여행을 차일피일 미뤄서는 안 되는 이유일세.

나이가 들면서 자기도 모르게 옹고집쟁이가 되는 노인들이 많네. 자기들이 직접 겪은 경험을 통해 얻은 지식만을 진리로 믿고 살기 때문이지. 하지만 이 세상에 절대적인 진리라는 건 없네. 자신이 가진 경험지식을 고정불변의 진리로 확신하는 순간 그 지식은 고정관념이 되고 말아. 2년 전 작고한 채현국 선생이 몇 년 전 <한겨레>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 아직도 귀에 생생하네. “지식을 가지면 ‘잘못된 옳은 소리’를 하기가 쉽다. 사람들은 ‘잘못 알고 있는 것’만 고정관념이라고 생각하는데 ‘확실하게 아는 것’도 고정관념이다. 세상에 ‘정답’이란 건 없다. 한 가지 문제에는 무수한 ‘해답’이 있을 뿐, 평생 그 해답을 찾기도 힘든데, 나만 옳고 나머지는 다 틀린 ‘정답’이라니…. 이건 군사독재가 만든 악습이다. 박정희 이전엔 ‘정답’이란 말을 안 썼다. 모든 ‘옳다’는 소리에는 반드시 잘못이 있다.”확실하게 아는 것도 고정관념이 될 수 있다는 것 잊지 말게. 우리 나이쯤 되면 ‘자기주장이 명확하다’는 말이 칭찬이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하네. 자신 있고 명쾌한 말일수록 틀릴 가능성이 높거든.

요즘 뇌 관련 책들을 즐겁게 읽고 있네. 많은 학자들이 하나같이 강조하는 게 뇌도 새롭고 신기하고 경이로운 것들을 좋아한다는 걸세. 그래서 뇌 건강을 위해서는 새로운 것을 배우거나 이전에 전혀 생각해보지도 않았던 의외의 것에 도전해보는 등 신선한 자극이 필요하다는 거야. 낯선 길을 걷거나 낯선 일을 해보는 걸 두려워해서도 안 되고. 게다가 새롭게 생각하는 것을 귀찮아하고, 호기심이나 모험심을 줄이고, 크건 작건 지속적으로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지 않으면 뇌 기능이 빠른 속도로 떨어진다고 하네. 만사가 귀찮다고 똑같은 행동만 반복하면 뇌 활동도 줄어들어 노화가 빨라진다는 거야. 노년기에도 계속 새로운 도전을 하고, 새로운 것을 배우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를 뇌 관련 최신 연구들이 과학적으로 설명해주고 있어서 재미있게 공부하고 있네. 최신 학문들을 통한 앎의 거듭남이라고나 할까.

오래전에 내 몸과 뇌에 똬리를 틀고 들어앉았던 익숙한 것들과 결별하고 새롭게 거듭나기를 계속하고 있는 노년의 하루하루가 동무들과 넓은 들판을 뛰어다니며 맘껏 놀았던 어린 시절처럼 설렘의 연속이어서 너무 좋아.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하면서 함께 뛰노는 행복한 검은 토끼해가 되길 바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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