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어제는 봄날처럼 따뜻해서 이른 저녁 식사 후에 동네 산책을 나갔네. 어디선가 바람에 실려 온 향내가 매화 향기 같아서 깜짝 놀랐지. 1월에 있었던 몇 차례 강추위 때문에 3월 중순에나 만날 줄 알았으니 매향에 놀랄 수밖에. 바람에게 길을 묻고 또 물어 찾아갔더니 봄마다 자주 찾아가 놀았던 골목의 고매(古梅)가 꽃을 피우고 있었네. 얼마나 반가운지 “안녕! 왔어!”라는 말이 절로 나오더군. 담장 밖으로 뻗친 성근 가지에서 꽃망울을 터트린 매화들과 골목이 어두워질 때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다 왔네. 매창(梅窓)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매화는 달밤에 더 잘 어울리는 꽃인데, 달이 없어서 좀 서운하기는 했지만… 꽃이랑 어떻게 노냐고? 친구랑 노는 거랑 비슷해. 서로 안부 인사하고, 예쁘다는 말도 주고받고,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비밀이나 고민거리를 털어놓기도 하고, 기분 좋으면 웃고, 슬픈 일이 있을 때는 울기도 하면서 놀아. 그러면서 내 삶을 성찰하는 ‘격물치지’의 시간도 함께 갖는 거지.

매화를 보니 지난 편지에서 이야기한 『화암수록』의 저자 유박(柳璞) 생각이 나더구먼. 유박은 꽃에 미친 사람, 즉 꽃마니아였네. 황해도 배천군 금곡의 서해 바닷가에 백화암(百花庵)이라는 꽃밭을 만들어 사시사철 피는 꽃을 즐겼던 시골 선비였어. 꽃을 좋아했던 조선 후기의 명신 체제공(蔡濟恭)은 유박에게 써준 <우화재기(寓花齋記)>에서 백화암을 ‘울타리 안이 향으로 가득한 중향국(衆香國)’으로 묘사하고 있네. 유마경(維摩經)에 나오는 불국(佛國)인 중향국은 온갖 꽃이 피어 있는 ‘꽃나라’라는 뜻이야. 재산을 탕진해가면서까지 다양한 화훼를 수집하며 꽃과 함께 살았던 유박이 유별나게 좋아했던 꽃은 매화였네. 그래서 그가 남긴 매화 시가 수십 수야. 그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조 <매농곡(梅儂曲)>인데, 그냥 읽지 말고 창(唱)을 하듯 읊어 보게.

눈보라 치는 산재에서 한 그루 매화 마주하여/ 웃으며 저를 보니 저도 나를 보고 웃는구나/두어라 매화가 나요 내가 매화인가 하노라

매화랑 놀고 있는 한 시골 선비 모습이 떠오르지 않는가? 그게 무슨 꽃이든 좋아한다면 이 정도는 미쳐야 하네. 내가 꽃 보고 웃으면 꽃도 나를 보고 웃어야 하고, 꽃이 나인지 내가 꽃인지 몰라야 해. 장자가 나비와 한 몸이 되듯 자신을 비우고 잃어버려야(오상아 吾喪我) 꽃과 내가 하나가 될 수 있는 거야. 매화가 나고(梅則儂) 내가 매화라니儂則梅)… 유박은 매화와 자기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물화(物化)의 상태를 자주 체험했던 것 같네.

옛 선비들은 봄이면 매화를 찾아 탐매(探梅) 여행을 떠났네. 중국 장안 동쪽 깊은 산에 살았던 당나라 시인 맹호연(孟浩然, 698~740)은 이른 봄이면 당나귀를 타고 파교(灞橋)를 건너 매화를 찾아 나섰지. 여기서 ‘파교심매(灞橋尋梅)’라는 고사(古事)가 생겼고, 조선의 화가들도 이를 그림으로 그렸어.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선비화가 심사정이 60세 때인 1766년에 그린 <파교심매도>야.

하지만 제주도를 제외한 우리나라의 거의 모든 지역은 매화의 고향인 중국의 강남보다 겨울이 추워서 산과 들에서 자생하는 매실나무는 보기 어렵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유명 고매들은 대부분 절이나 고택에 심어 기른 것들일세. 그 중 유명한 것이 문화재청이 2007년에 천연기념물로 지정한 다섯 그루의 고매, 늙은 매실나무들이지. 강릉 오죽헌의 율곡매, 구례 화엄사의 화엄매, 장성 백양사의 고불매, 순천 선암사의 선암매가 그 주인공들이네. 왜 네 그루가 아니고 다섯 그루냐고? 순천 선암사의 원통전 담장 뒤의 백매와 각황전 담길의 홍매 두 그루가 함께 천연기념물 제 488호이기 때문이지.

머지않아 남도의 고매들이 꽃을 피우기 시작할 걸세. 아집과 편견으로 가득한 이 혼탁한 세상에서 잠시 벗어나 매화랑 하나가 되는 선비의 시간을 갖길 바라네. 어디가 좋냐고? 물론 내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구례 화엄사의 홍매화와 순천 선암사의 매화들을 추천하고 싶네. 화엄사 각황전 옆에 있는 홍매화는 조선 숙종 때 심은 나무로 다른 곳에서는 보기 드문 진홍색 꽃을 피워서 인기가 매우 높지. 꽃 색깔이 검붉어서 ‘흑매화’라고도 불러. 많은 사람들이 그 홍매를 보려고 화엄사를 찾지. 하지만 천연기념물 제485호로 지정된 화엄매는 이 홍매가 아닐세. 화엄매는 화엄사 길상암 앞 대나무 숲에 있는 약 450년 된 백매 한 그루야. 사람이나 동물이 먹고 버린 매실 씨앗에서 싹이 나와서 자란 들매화(野梅)이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매화들 중 유일한 야생 매화일세.

선암사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홍매와 백매 두 고매도 있지만, 나는 운수암으로 오르는 돌담길에 있는 50여 그루의 매화나무들을 더 좋아하네. 나이가 350살에서 650살 정도 되는 나무들인데 모두 '선암매'라고 부르지. 돌담길과 매화 터널, 상상만 해도 멋진 조합 아닌가? 운치를 알고, 꽃과 함께 격물치지와 오상아의 시간을 갖고 싶은 사람들에게 꼭 가보라고 추천하고 싶은 곳일세. 마지막으로 황동규 시인의 <풍장(風葬) 40>일세. ​

선암사 매화 처음 만나 수인사 나누고/ 그 향기 가슴으로 마시고/ 피부로 마시고/ 내장(內臟)으로 마시고/ 꿀에 취한 벌처럼 흐늘흐늘대다/ 진짜 꿀벌들을 만났다// 벌들이 별안간 공중에 떠서/ 배들을 내밀고 웃었다./ 벌들의 배들이 하나씩 뒤집히며/ 매화의 내장으로 피어……// 나는 매화의 내장 밖에 있는가/ 선암사가 온통 매화,/ 안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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