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봄이면 꽃을 찾아다니느라 무척 바빠. 올해는 다른 해보다 봄꽃들이 1주일 정도 일찍 피어서 3월에 노루귀, 변산바람꽃, 꿩의바람꽃, 만주바람꽃, 현호색, 얼레지, 큰괭이밥, 괭이눈 등 많은 꽃들을 보았네. 이 땅에서는 봄에만 만날 수 있는 꽃들이라 눈에 띄면 먼저 이름부터 부르는데, 문제는 그 꽃들의 이름이 바로 떠오르지 않을 때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는 거야. 지난 십여 년 동안 만날 때마다 정답게 불러주던 이름인데도 더듬거릴 때가 많아지고 있으니 황당할 수밖에. 그럴 때 누가 “이 꽃 이름이 뭐에요?”라고 물으면 더 당황해서 횡설수설 하게 되지. 젊었을 땐 꽤 좋은 기억력을 가졌다고 자부했는데 꽃과 사람 이름뿐만 아니라 예전의 소중했던 경험들이 점점 기억 속에서 희미해지거나 사라지고 있는 것만 같아서 서글플 때가 많아.

근데 그런 건망증이 나만 겪는 고통은 아닌가 보네. 얼마 전에 소개했던 『내가 늙어버린 여름』에서 이자벨 드 쿠르티브롱도 나와 비슷한 경험을 말하고 있어서 혼자 웃었지.

“최근 들어서 점점 더 뚜렷하게 느끼는 점은 정신마저 닳는다는 사실이다. 사실 나는 언제나 정신이 약간 멍한 상태이긴 했으나, 요즘 들어 상태가 정말로 걱정스러워지고 있었다. 가령 외출하면서 문에 열쇠를 꽂아두는 일이 잦아졌다던가 배낭이 어디 있는지 한참을 정신없이 찾다가 등에 메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는 식이다. 날짜를 틀리는가 하면 약속을 잊는 일도 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나 놓치지 말고 꼭 봐야 할 영화를 신이 나서 추천하려는 순간, 그토록 감탄해 마지않았던 책이며 영화의 제목을 기억해내지 못하기도 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그런 사람이 된 것이다. 내 주위에서는 이런 일이 점점 더 잦아지고 있다.”

나이 들면서 점점 심해지는 이런 건망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처음에는 좀 당황했고 걱정도 했지만 요즘은 그냥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네. 이 세상에 오래 사용해도 닳지 않는 것은 없다는 걸 자연의 섭리로 받아들이니 마음이 편해지더군. 그래서 요즘은 깜박깜박 잊는 걸 별로 신경 쓰지 않네. 걱정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 혹시 치매가 아닐까 걱정하면 할수록 건망증의 악화 속도가 더 빨라질 것 같아서 그냥 허허 웃고 말아. 당나라 시인 두목(杜牧)은 나이 들면 누구나 머리가 희어지는 게 공평하고 바른 도리(白髮公道)라고 말했는데, 사람들이 당나라 때보다 훨씬 더 오래 사는 21세기에는 건망증을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공평하고 바른 도리(公道)’로 받아들이고 사는 게 더 현명하지 않을까.

게다가 건망증이 전적으로 나쁜 것만은 아닐 때도 있네. 지난 일들을 잊지 못하고 계속 기억해야만 하는 게 건망증 못지않게 삶의 질을 떨어뜨릴 수도 있거든. 살다보면, 빨리 망각하고 싶은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별로 유쾌하지 못했던 만남이나 사건들은 바로 잊어버리는 게 노년을 지혜롭게 사는 방법이야. 요즘 이 나라 정치인들이 쏟아내는 막말과 철지난 헛소리들을 잊지 않고 다 기억한다고 생각해 보게. 상상만 해도 끔찍하지 않는가. 그런 정치인들의 말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게 정신 건강에 좋을 걸세.

지난 1년 대통령의 막말을 들을 때마다 『열자』 「주목왕」편에 나오는 송나라 사람 화자(華子)의 말이 떠올랐네. 그가 심한 건망증을 앓다가 한 유생(儒生)의 도움으로 제정신이 들었을 때, 창을 들고 그 유생을 쫓아가면서 했던 하소연을 나도 따라 하고 싶었다고나 할까. “지금까지 나는 몽땅 잊은 채 아무 막힘없이 살았으니, 천지가 있는지 없는지조차 몰랐으나 이제 갑자기 지나간 수십 년 이래 있었던 일 없었던 일, 얻었던 것 잃었던 것, 슬퍼했던 일 즐거웠던 일, 좋아했던 것 싫어했던 것 등등 온갖 잡동사니가 어지러이 떠오르고 있소. 또 나는 앞으로도 존망과 득실, 애락(哀樂)과 호오(好惡)의 생각으로 내 마음이 이렇게 어지러워질까 두렵소. 어떻게 다시 바로 잊어버릴 수 있겠소?” 지금 이 나라에서는 망각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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