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안도현 시인의 <3월과 4월 사이>부터 읽고 시작하세.

“산서고등학교 관사 앞에 매화꽃 핀 다음에는/ 산서주조장 돌담에 기대어 산수유꽃 피고/ 산서중학교 뒷산에 조팝나무꽃 핀 다음에는/ 산서우체국 뒤뜰에서는 목련꽃 피고/ 산서초등학교 울타리 너머 개나리꽃 핀 다음에는/ 산서정류소 가는 길가에 자주제비꽃 피고”

3월 하순과 4월 초순 사이, 전라북도 장수군 산서 면 소재지 여기저기에 순서대로 피는 꽃들을 노래하고 있는 시일세. 예전에는 대한민국 어디에서나 봄꽃들이 피는 순서가 일정했네. 예를 들어 서울 관악산 북쪽 기슭에 있는 우리 동네의 경우, 매화 생강나무 산수유의 꽃이 제일 먼저 3월 하순에 피고, 진달래 개나리 목련 앵두나무 자두나무 왕벚나무 살구나무는 4월 초순, 산벚나무 개복숭아 돌배나무 자목련은 4월 중순, 그리고 철쭉 종류는 4월 하순과 5월 초순에 피었어. 많은 나무들이 일정한 시간 간격을 두고 차례로 꽃을 피워서 한 달 이상 꽃들과 놀 수 있었지.

하지만 지금은 봄에 나무들이 꽃을 피우는 순서가 뒤죽박죽 엉망이 되고 말았네. 특히 올해는 역대 가장 더운 3월로 인해 많은 나무들이 예년보다 평균 보름 일찍, 그리고 거의 동시에 피었다가 져버렸어. 예년 4월 중순이면 많은 꽃들이 경쟁하듯 필 때인데, 동네 야산에 올라가도 꽃이 없네. 봄에 일찍 피는 꽃들은 대부분 잎보다 먼저 나오는데 지금 동네에서 보는 나무들은 철쭉 종류 외에는 다 잎들뿐이야. 봄이 너무 일찍 왔다가 가버린 것 같아서 얼마나 서운한지 몰라. 봄을 도둑맞은 기분이라고나 할까.

봄꽃들이 순식간에 왔다가 사라진 동네 풍경을 보면서 지구 생태계가 인간들 때문에 크게 앓고 있다는 걸 새삼 알게 되었네. 이른 봄인데도 꽃 대신 잎만 달고 있는 나무들을 보고 있으면 그들의 끙끙거리는 소리가 들려. 젊었을 때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외웠던 김수영 시인의 <먼 곳에서부터>라는 시를 이제야 제대로 이해하게 됐구먼. 올해처럼 봄꽃들이 한꺼번에 요란스럽게 왔다 가면 내 몸이 아프다는 것을. 무엇보다도 지구가 아플 때 내 몸도 함께 앓는다는 것을.

“먼 곳에서부터/ 먼 곳으로/ 다시 몸이 아프다// 조용한 봄에서부터/ 조용한 봄으로/ 다시 내 몸이 아프다// 여자에게서부터/ 여자에게로// 능금꽃으로부터/ 능금꽃으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몸이 아프다”

그러면 지구의 아픔을 덜어주기 위해서 노인이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지구를 다시 살리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기 위해서는 노인들부터 먼저 게을러져야 하네. 될 수 있으면 아무 것도 하지 않아야 해. 나태주 시인이 <게으름 연습>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텃밭을 가꾸는 대신 낮잠이나 자고, 흰 구름이나 보고, 새소리나 들으면서 놀아야 해. 물론 땅도 함께 쉬어야지. 그래야 다양한 식물들과 벌레들이 찾아와 살면서 땅도 다시 살아나. 그러니 기후재앙 시대에는 부지런한 게 결코 미덕이 아니야. 이재무 시인도 <코로나 19>에서 말했지. 사람들의 활동이 줄어들어야 산과 들이 기력을 찾는다고.

“공장 가동이 멈추자/ 하늘 푸르고 강물 맑아졌네/ 거리에 인간 소음 잦아들자/ 공기 투명해져 새들의 음표/ 더욱 높고 발랄해졌네/ 인간은 자연의 악성 바이러스/ 우리 몸 시들할수록/ 산과 들 기력을 찾네/ 사람에게 재앙인 코로나/ 자연에게 더 없는 축복이라네”

인류의 긴 역사에서 사람은 항상 자연의 일부였네. 하지만 근대가 시작되면서 인간은 자연과 결별하기 시작했지. 자연을 이용의 대상으로만 여기고 무자비하게 착취하기 시작했어. 지금 인류가 겪고 있는 기후위기는 그런 인간들의 탐욕에 대한 자연의 복수야. 지난 3월 유엔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도 제6차 평가보고서를 통해 “모두가 살 만하고 지속할 수 있는 미래를 확보할 기회의 창이 빠르게 닫히고 있다”고 경고했네. 현재처럼 탄소를 배출한다면 10년 이내에 지구 평균온도가 산업화 이전과 비교해 1.5도 이상 상승해 지구 생태계가 붕괴 수준에 직면한다는 거지. 그런데도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기후위기가 인간의 과도한 욕망 때문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네. 그런 인류에게 남은 건 뭘까? 제 6의 절멸이야. IPCC의 6차 평가보고서는 6600만 년 전 갑자기 지구에서 공룡이 사라지듯 인간이 사라지는 미래가 결코 멀지 않다고 경고하고 있네.

저작권자 © 시사위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