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종 한국국가전략연구원 북한연구센터장북한학 박사
이영종 한국국가전략연구원 북한연구센터장
북한학 박사

본격적인 결혼 시즌을 맞은 요즘, 식장에선 신랑신부의 개성 넘치는 이벤트가 빠질 수 없다. 주례가 없는 결혼식은 다반사이고 대신 양가의 부모나 신랑신부가 나서 포복절도할 내용의 편지를 읽거나 하객의 눈물을 쏙 빼는 사연을 전하기도 한다. 신랑신부 친구들이 준비한 깜짝 이벤트가 SNS를 달구기도 한다.

이런 모습들이 북녘 땅의 청춘 남녀들에게도 전해져 가슴을 뒤흔든 듯하다. 최근 북한에서는 남한의 결혼식 스타일을 따라하는 풍조가 번지고, 서울에서나 볼법한 이벤트를 벌이는 경우까지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한류를 대표해 온 영화와 드라마·가요뿐 아니라 결혼문화까지 북한에 상륙해 감수성이 예민한 20~30대 연령층인 ‘MZ세대’를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북한 당국엔 비상이 걸렸다. 그대로 방치하다가는 청년세대들이 이른바 황색바람과 외부사조에 물드는 일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질 수 있다는 위기감에서다. 이를 ‘부르주아 날라리풍’이라고 비판하면서 각종 강연이나 사상교양 학습 등을 통해 남한풍 결혼식을 치르지 말 것을 강조하면서 단속의 고삐를 죄고 있다는 게 대북 소식통과 정부 당국자들의 귀띔이다.

미국 자유아시아방송(RFA)를 비롯한 대북 전문매체들의 보도를 종합하면 북한에서는 올 봄 들어 결혼이 부쩍 늘고 있다고 한다. 코로나19 사태로 엄두를 내지 못했던 예비 신랑신부들이 미뤘던 결혼식을 치르는 일이 잦아진 때문이다. 그런데 한류 유입으로 인해 ‘남조선풍 결혼’이 늘면서 북한 당국의 이런저런 간섭도 늘고 있다고 한다.

함경남도 단천시의 한 공장 초급당 비서는 지난 3월말 해설담화를 통해 결혼식을 사회주의 생활양식에 맞게 우리식으로 검소하게 치르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주민 사상교육 시간인 해설담화에서는 결혼식 잔치상을 요란하게 차리거나 신랑이 신부를 데려갈 때 승용차 여러 대를 동원해 위세를 뽐내는 등의 현상이 지적됐으며 “지금의 어려운 시기에 식량과 연유(휘발유)를 낭비하는 비애국적인 행동을 하지 말 것”을 강조하는 지시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대북 소식통은 “당국은 신랑 신부의 옷차림과 단장을 사회주의 생활양식에 맞게 할 데 대해서도 강조했다”며 “특히 조선옷(한복)을 입은 신부가 면사포 같은 얇은 천을 머리에 쓰거나 외국 글자나 상표가 새겨진 옷을 입고, 색안경을 쓰고, 신부의 앞가슴과 머리를 꽃으로 가득 장식하는 등 우리식이 아닌 행동들을 지적했다”고 전했다. 신부라면 누구나 꿈꿨을 면사포를 쓰지 못하게 하면서 볼멘소리가 나온다고 한다.

북한은 해설담화를 통해 “결혼사진을 우리식으로 고상하게 찍으라”는 지시도 하고 있다고 한다. 남한식으로 신랑신부가 입맞춤을 하거나 연출된 포즈로 웨딩사진을 찍는 걸 금지시킨 것이다.

특히 ”신랑이 신부를 허리 위로 안아 들어 올리고, 신랑·신부가 포도주가 든 술잔을 부딪치고, 신부가 신랑에게 담뱃불을 붙여주는 등 우리식이 아닌 행동을 하며 사진을 찍지 말라“는 내용도 포함됐다는 게 대북 소식통의 설명이다. 신랑이 하객들 앞에서 신부를 들어올리는 건 남한에서 이미 오래된 이벤트지만 북한에선 금기시되는 것이다.

결혼식에 친구들이 몰려다는 걸 금지하는 등 지나치게 간섭하는 듯한 대목도 눈길을 끈다. 공장에서 일해야 할 청년들이 결근하거나 조퇴해 친구인 신랑이나 신부를 따라 우르르 몰려다니는 현상에 북한 당국이 못마땅한 반응을 보인 것이다.

대북 소식통은 “청년들이 결혼식에 가는 것도 하루 일을 마치고 가라는 것이고 열 명 혹은 그 이상 청년들이 대낮에 웨딩촬영을 하는 신랑 신부를 따라다니지 말라는 지적”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함경북도 부령군의 한 주민도 “당국의 의도는 어려운 시국에 맞지 않게 결혼식을 요란하게 하거나 신랑 신부의 옷차림이나 결혼사진을 찍을 때 외국풍을 따르지 말라는 것”이라며 “수년 전에도 결혼식 때 신랑·신부가 가슴과 머리에 다는 꽃의 크기는 물론 사진을 찍을 때 어떤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내용의 지침을 내린 바 있다”고 말했다. 최근 들어 더욱 강화된 단속 기준을 내세우고 있다는 얘기다.

북한은 사상교양이나 해설담화를 통해 사회주의 생활양식에 배치되는 이색적인 행동을 하는 경우 처벌을 받는다는 엄포를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움직임은 북한도 4, 5월과 10, 11월이 가장 붐비는 결혼시즌이라 통제 차원에서 내놓은 것으로 분석된다.

북한 당국이 이처럼 주민들의 일상생활까지 감놔라 배놔라 하는 식의 간섭을 하며 단속에 나서자 주민들은 불만을 표시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나름대로의 대처에 나서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결혼식을 하면서 남한식 이벤트의 경우 친구들만 있는 자리에서 하거나 단속원이 있는지 망을 보는 일까지 있다는 것이다.

북한 당국의 한류 단속은 결혼식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다. 요즘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특별지시에 따라 남한식 말투 단속에도 북한 공안기관이 집중하고 있다고 한다. 이에 주민들이 북한말투로 이야기하는 걸 연습하는 진풍경까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대북 소식통은 “요즘 한국식 말투에 대한 단속이 강화되자 한국말이 얼결에 튀어나와 처벌받을까 염려돼 조선(북한)식 말투를 연습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사람들이 ‘오빠’ ‘자기야’ ‘사랑해’ 같은 말을 자연스럽게 하는 것은 한국 영화를 귀에 익고 입에 오를 정도로 봤다는 증거”라며 “하지만 당에서 평양말을 살려야 한다고 강조하자 최근 주민들이 ‘기래서(그래서)’나 ‘알간(알겠니)’ 등 평양말을 연습하는 실정”이라고 설명했다. 오빠·자기나 남친·여친 같은 남한식 말투 대신에 동무·여보 등 북한에서 쓰이는 말을 의식적으로 쓰려 노력한다는 얘기다.

북한은 지난 1월 최고인민회의에서 ‘평양문화어보호법’을 채택해 남한식 말투나 외래어를 쓰면 단속·처벌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남한식 말투를 쓰면 6년 이상의 노동교화형(징역), 남한말투를 가르칠 경우 최고 사형에 처하는 조항을 담고 있는 이 법은 주민들의 일상을 옥죄고 외부 자유세계에 눈뜨는 걸 막으려는 반인권적 악법으로 비판받고 있다. 당연히 젊은 층을 중심으로 김정은 체제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는 모습이다.

결혼식은 청춘남녀가 하나의 가정을 이뤄 새로운 삶을 여는 소중한 자리다. 그런데 공안기관이나 당국이 관여해 소소한 이벤트까지 간섭하고 단속하는 건 북한 스스로 체제 유지에 대한 자신감을 잃어가는 행동이란 지적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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