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노인이 되면 늙어 섧다는 사람도 있지만 좋은 점들도 많네. 무엇보다도 집착할 게 없어 항상 마음이 평안해서 좋아. 다른 사람들보다 잘하고 싶은 것도 별로 없고, 이것만은 꼭 이겨야겠다는 호승심도 사라진지 오래됐어. 가장 좋은 건 돈 쓸 일이 그리 많지 않다는 거야. 그래서 정해진 용돈으로 큰 불편 없이 내가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즐겁게 살 수 있어서 정말 좋아.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다 나 같지는 않는가 보네. 아직도 부동산이나 주식에 기웃거리는 노인들이 꽤 많으니 말이야. 그러다가 추락하는 지인도 직접 봤어. 아직도 돈이라는 괴물에 얽매여 사는 노인들 보면서 생각난 시가 박용하 시인의 ‘돈’일세.

“나는 어느덧 세상을 믿지 않는 나이가 되었고// 이익 없이는 아무도 오지 않는 사람이 되었고/ 이익 없이는 아무도 가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부모형제도 계산 따라 움직이고/ 마누라도 친구도 계산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그게 싫었지만 내색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고/ 너 없이는 하루가 움직이지 않았고/ 개미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왕이고 마술사라는 것 나도 인정하네.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게 ‘상품’으로 사고 팔리는 세상이니 공짜로 얻을 수 있는 게 별로 없어. 예전에도 몇 번 말했지만, 지금 당장 하던 일을 멈추고 생각해 보게나. 비정한 자본주의 사회인 대한민국에서 돈 없이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남아 있는가를… 별로 가진 게 없는 나 같은 사람들이 가끔 ‘사람 나고 돈 났지 돈 나고 사람 났냐?’고 작은 소리로 항의도 해보지만, 이제는 맞는 말이라고 맞장구치는 사람도 드물어. 자본주의라는 고약한 괴물이 대다수 사람들을 돈의 노예로 만들기 전인 우리 어렸을 때나 통했던 말이라는 뜻이야. 지금 그런 말 하면, 아니꼬우면 출세하라고 비웃는 사람들이 더 많아.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다수 사람들이 좋아하지만 잘못 다루면 위험한 요물이 되고 마는 게 돈이야. 혼자 너무 많이 가지려고 욕심을 부리면 본인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에게도 큰 고통을 주는 재앙의 원천이기도 해. 돈 때문에 싸우고 남들처럼 지내는 형제자매들이 얼마나 많은가. 심지어 돈에 눈이 멀어 부모나 형제를 죽이는 자들도 있어. 속된 말로 말세지. 기후위기와 인공지능(AI)만 인류의 종말을 재촉하는 게 아니란 말일세. 물론 그런 위기들의 근원도 결국 돈에 대한 욕망 때문에 생긴 것들이고.

1970년대 이후 산업화와 도시화가 급격하게 이루어지면서 세상인심도 돈과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자본주의 사회가 되어버렸어. 순박했던 사람들이 갑자기 가슴이 아닌 머리로 계산을 하기 시작한 거야. 이른바 합리적인 개인의 탄생이지. 친구도 자기에게 뭔가 이익이 돼야 사귀고, 연예도 실질적인 이득이 없으면 하지 않게 되어버렸어. 첫눈에 반해 모든 걸 다 걸었던 낭만적 사랑의 소멸이야. 부모와 자식 관계도 돈이 개입하게 되었지. 부모가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지 않으면 1년에 한 번도 찾아뵙지 않는 자식들도 있어. 그러니 노인빈곤율이 50%에 가까운 대한민국에서 많은 노인들이 ‘개미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는 사람’으로 쓸쓸하게 살다 갈 수밖에 없지.

그러면 많은 돈 없이 즐겁게 사는 방법은 없을까? 물론 있네. 돈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세상이지만 삶에서 정말로 소중한 것들은 아직 공짜가 많아. 박노해 시인이 <다 공짜다>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런 것들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지. 그러니 주머니 좀 가볍다고 기죽지 말게. 따뜻한 마음만 있으면 우리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것들이 아직도 많거든.

“세상에 공짜가 어딨냐고/ 힘주어 말하는 자들은/ 똑똑한 바보들이다// 인생에서 정말로 좋은 것은 다 공짜다// 아침 햇살도 푸른 하늘도/ 맑은 공기도 숲길을 걷는 것도/ 아장아장 아이들 뛰노는 소리도/ 책방에서 뒤적이는 지혜와 시들도/ 거리를 걷는 청춘들의 시원한 자태도/ 아무 바람 없는 친절과 미소도/ 푸른 나무 그늘도 밤하늘 별빛도/ 계절 따라 흐르는 꽃향기도/ 그저 이 지구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고맙고 눈물 나는 숨은 빛의 사람들도/ 내 인생의 빛나는 것들은 다 공짜다// 돈으로 살 수 없고/ 숫자로 헤아릴 수 없고/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들은// 삶에서 진실로 소중한 것들은 다 공짜다”

“삶에서 진실로 소중한 것들은 다 공짜다”라는 시인의 말 잊지 말게. 공짜로 얻을 수 있는 게 많아야 좋은 세상이라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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