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내가 사는 동네는 아파트단지가 아니라 아직 골목들이 있고, 그 골목길에는 다양한 식물들이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어 좋네. 보도블록 틈새에 뿌리를 내리고 노란색 꽃을 피우는 민들레와 고들빼기도 있고, 콘크리트 옹벽에 생긴 작은 틈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아 많은 꽃을 피우고 있는 애기똥풀과 제비꽃도 있지. 온갖 악조건을 이겨내고 꽃을 피우는 이런 식물들을 보면 절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어. 경이로운 생명력에 대한 진심 어린 존경심의 표현이라고나 할까. 그럴 때마다 생각나는 시가 배한봉의 시인의 <빈곳>이야.

“암벽 틈에 나무가 자라고 있다. 풀꽃도 피어 있다./ 틈이 생명줄이다./ 틈이 생명을 낳고 생명을 기른다./ 틈이 생긴 구석./ 사람들은 그걸 보이지 않으려고 안간힘 쓴다./ 하지만 그것은 누군가에게 팔을 벌리는 것./ 언제든 안을 준비 돼 있다고/ 자기 가슴 한 쪽을 비워놓은 것./ 틈은 아름다운 허점./ 틈을 가진 사람만이 사랑을 낳고 사랑을 기른다./ 꽃이 피는 곳./ 빈곳이 걸어 나온다./ 상처의 자리. 상처에 살이 차 오른 자리./ 헤아릴 수 없는 쓸쓸함 오래 응시하던 눈빛이 자라는 곳.”

아스팔트나 시멘트로 포장된 골목길에서 식물들과 함께 살다 보면, 틈이 “생명줄”이고, “생명을 낳고” 기르는 “아름다운 허점”이라는 시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네. 흙을 볼 수 없는 도시의 거리나 골목길에 틈이 없다고 생각해보게. 도시는 아마 지금보다 훨씬 더 삭막한 시멘트 사막으로 변할 것일세. 물론 그런 도시에서 사는 사람들의 심성도 더 거칠어질 수밖에 없고.

시인의 말대로 빈틈은 사람에게도 “아름다운 허점”이네. “틈을 가진 사람만이 사랑을 낳고 사랑을 기른다”는 건 누구도 쉽게 부정할 수 없는 말이야. 뒤돌아보면, 나는 자기 허점을 보이지 않으려고 했던 사람들과는 오래 사귀지 못했던 것 같네. 그냥 ‘아는 사이’로 지내기는 했지만, 며칠 보지 못하면 보고 싶고 그리운 ‘친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던 것 같아. 사람들은 흔히 합리적이고 빈틈이 없는 사람을 ‘꽉 찼다’라고 말하네. 하지만 그런 사람과 친구나 애인으로 자내기는 어려워. 사랑이나 우정은 두 사람이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가면서 더 깊어지는 것인데 꽉 차 빈틈이 없다면 두 사람이 만나 할 일이 뭐가 있겠나. 그래서 난 비집고 들어갈 틈이 많은 좀 부족한 사람이 좋네. 틈이 있는 곳에서만 꽃이 피고 사랑이 무르익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야.

노인들에게도 빈 공간은 중요하네. 뒤돌아보면 우리는 빈 공간이 아까워 뭐든 채우려고만 애쓰면서 살아왔던 것 같아. 빈 공간, 빈틈이 생명의 공간이라는 걸 알지 못했지. 하지만 이제 버리고 비어두는 연습을 해야 할 때일세. 책과 옷과 잡동사니들로 꽉 찬 방, 오래된 음식물 그릇들과 음료수 병들로 빈 공간이 없는 냉장고, 즐거웠던 옛 추억과 쓸데없는 근심 걱정으로 가득 찬 머릿속. 생각만 해도 답답하지 않는가? 방이든 냉장고든, 마음이든 머리든, 이제 하나하나 비우는 연습을 해보게. 하나씩 비우다보면 이전보다 훨씬 더 넉넉한 마음으로 살 수 있을 걸세. 그 빈자리에서 새로운 생각과 상상력이 솟아나는 기쁨도 맛 볼 수 있고.

내가 좋아하는 노자(老子)에게도 빈 공간은 도(道)가 머무는 곳이었네. 먼저, 김용옥의 번역으로 『노자』제11장을 읽어보세. “서른 개 바퀴살이 하나의 바퀴통으로 모인다. 그 바퀴통 속의 빔에 수레의 쓰임이 있다. 찰흙을 빚어 그릇을 만든다. 그 그릇의 빔에 그릇의 쓰임이 있다. 문과 창을 뚫어 방을 만든다. 그 방의 빔에 방의 쓰임이 있다. 그러므로 있음의 이로움이 됨은 없음의 쓰임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과 정신도 ‘없음’을 유지해야만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네. 빈자리가 있어야 다시 채울 수 있거든. 자기 생각이나 고집으로 가득 차 있으면 노년의 삶이 팍팍할 수밖에 없어. 언제든 뭔가 들어올 수 있게 비워 놓고 살아야 해. 그렇지 않으면 늙어가면서 옹고집쟁이가 될 가능성이 많아. 자신의 과거 경험과 성공 방식으로 머리를 꽉 채우고 세상이 변해도 비우거나 바꾸지 않으니 뇌가 굳을 수밖에. 그러니 틈이 없는 삶은 삭막하고 각박할 수밖에 없다는 걸 잊지 말게. 좀 어설픈 곳, 즉 틈이 있어야 사람도 식물도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울 수 있거든. 자네나 나나 이제 좀 바보처럼 살아도 괜찮은 나이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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