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종 한국국가전략연구원 북한연구센터장북한학 박사
이영종 한국국가전략연구원 북한연구센터장북한학 박사

‘칼로리 정치’란 말은 어감이 섬뜩하다. 칼로리 즉, 먹는 문제로 사람들을 통제해 정치적 목적을 이룬다는 뜻이니 무척 비인간적이고 반인도적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서다.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뱃살이나 체중 때문에 음식의 칼로리를 하나하나 체크하고 줄여나가는 많은 사람들을 떠올리면 더욱 그렇다. 155마일 휴전선은 그렇게 70년 동안 남북을 다른 세상으로 만들어 버렸다.

김정은 정권의 칼로리 정치는 교묘하다. 주식인 쌀과 옥수수를 장마당 가격보다 싸게 국영 양곡판매소에서 공급하는 게 요체다. 북한 내부 실상을 오랜 기간 추적해온 아시아프레스가 지난 28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공개한 바에 따르면 지난해 하반기 기준 쌀 1kg의 시중 가격이 북한돈 6,000원정도인데, 양곡판매소에서는 4,200원에 살 수 있다. 옥수수는 3,000원인걸 2,200원에 구입 가능하다.

언뜻 보면 훨씬 싸게 공급받을 수 있으니 주민들에겐 반갑고 고마운 일인 것 같다. 하지만 북한 당국의 노림수는 딴 데 있다. 식량 공급을 노동당이 통제하는 양곡판매소로 일원화 하고, 장마당이나 사적인 식량 거래는 단속을 통해 완전 차단한다는 복안이다. 벌써 북한은 시장에서 판매하는 식량의 출처 증명을 요구하고, 농촌에서는 식량 유출 통제에 나섰다고 한다.

김일성 사망 직후인 1990년대 중후반 수백만명이 굶어 죽었다고 전해지는 이른바 ‘고난의 행군’ 시기 이후 사실상 붕괴된 정권 차원의 배급체계를 다시 틀어쥐겠다는 심산으로 보인다.

양곡판매소에서 구입할 수 있는 물량을 월 1회, 1인당 5kg 정도로 제한해 세대단위로 판매하는 점에서도 이를 엿볼 수 있다. 무단결근하거나 노동당이 배치해준 직장 및 근무지에서 이탈한 경우에는 대상에서 제외되니 굶지 않으려면 꼼짝없이 따라야 한다.

문제는 식량 절대량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영국의 민간 국제개발지원 단체 ‘개발 이니셔티브(DI)’는 최근 공개한 ‘2023 국제 인도주의 지원 보고서’에서 북한을 예멘·시리아·콩고민주공화국·아프가니스탄·베네수엘라와 함께 2019년 이래 1,000만명 이상의 인구가 지속적으로 인도주의 위기를 겪는 나라로 꼽았다. 2,500만명의 인구 가운데 1,040만명이 만성적인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다는 얘기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노동당 회의가 열릴 때마다 ‘먹는 문제의 해결’을 강조한다. 지구상에 최고지도자가 식량난 타령을 입에 달고 살아야 하는 나라가 많지 않지만, 북한은 이미 오래고 해결의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비합리적인 집단농업 시스템에다 핵·미사일 도발로 자초한 대북제재와 경제난으로 비료와 농약 등 농자재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굶주리는 주민들을 최우선으로 생각한다면 외부에서 긴급 구호를 받거나 식량 차관을 통해 해결할 수 있지만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이 길마저도 외면하고 있다. 코로나 유입에다 ‘자본주의 국가가 주는 독약’이란 말까지 노동신문 등을 통해 퍼트리며 주민들을 세뇌시키는 데 급급해 한다.

2011년 12월 아버지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으로 권좌를 거머쥔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이듬해 4월 첫 공개연설에서 “다시는 인민들이 허리띠를 조이지 않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핵과 미사일에 집착하면서 공수표가 됐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고난의 행군 시기 스위스 베른에 머물며 조기유학을 했다. 형 김정철과 여동생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도 함께했다. 이른바 백두혈통의 왕자·공주로 행세하며 해외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니 굶주리는 주민들의 고통을 알 길이 없을 것이다.

반인륜적인 칼로리 정치에 집착하는 건 극악한 범죄행위다. 독재 권력의 지탱을 위해 주민을 옥죄려는 수단으로 이를 사용한다면 더욱 문제다. 이대로라면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북한 집권세력의 말로는 뻔해 보인다. 코페르니쿠스적인 결단을 통해 개혁·개방과 민생을 챙길 수 있는 시간이 많이 남아있지는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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