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종 한국국가전략연구원 북한연구센터장북한학 박사
이영종 한국국가전략연구원 북한연구센터장
북한학 박사

북한 김정은 체제가 코로나로 닫아걸었던 문을 3년여 만에 열어젖혔다. 7월 말 중국과 러시아의 고위 대표단이 북한 당국의 초청에 의해 평양을 방문한 것이다. 이들이 방북할 수 있었던 건 북한이 ‘7.27 전승절’로 주장하는 6.25전쟁 정전협정 체결 70주년 행사 참석을 위해서다.

북한은 대규모 병력과 주민동원을 통해 경제난과 대미압박으로 위기에 봉착한 체제의 ‘건재’를 과시하려 했다. 심야 열병식을 통해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과 무인기 등을 선보이며 존재감을 뽐내려 한 것이다. 그 자리에 김일성의 6.25전쟁 도발의 든든한 후견자인 중국과 러시아가 빠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을 테다.

눈길을 끈 건 러시아 대표단을 대하는 김정은 위원장의 태도였다.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침공을 감행해 1년 넘게 고전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도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장관을 단장으로 하는 군사대표단을 평양에 파견했다. 북러 국방장관 회담을 통해 군사협력 방안이 논의됐지만 양측 모두 구체적인 내용에는 함구하고 있다.

김정은 위원장은 지난 26일 쇼이구를 접견하고 푸틴의 친서를 전달받았으며, 정전협정 체결 70주년 행사에 대표단으로 온 러시아 국방장관 일행에게 사의를 표했다. 북한 관영 조선중앙통신은 두 사람의 만남에 대해 “새 세기의 요구에 맞게 전략적이며 전통적인 조로(조선과 ‘로씨야’) 관계를 가일층 강화·발전시키고 급변하는 지역 및 국제안보 환경에 대처하여 국방안전 분야에서 두 나라 사이의 전략·전술적 협동과 협조를 더욱 심화 발전시켜 나가는데서 중요한 계기로 된다”고 장황하게 의미를 부여했다.

놀라운 건 김정은 위원장이 직접 쇼이구를 안내하면서 북한의 신형 무기를 설명하는 모습을 연출했다는 점이다. 평양에서 열리고 있는 무장장비 전시회장을 함께 찾은 김정은 위원장은 러시아 군사대표단에게 북한이 개발한 것으로 알려진 신형 무인기와 ICBM급 미사일을 열심히 알렸고, 이 장면은 노동신문과 조선중앙TV를 통해서도 공개됐다.

특히 북한은 무인기의 경우 실제 운항하는 모습과 미사일 발사 장면까지 영상으로 공개해 관심을 끌었다. 이를 두고 북한이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러시아 측에 무인기 판매 등을 하기 위해 김정은 위원장이 마케터 역할을 자처하고 나선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북한의 노림수는 이뿐만이 아닌 듯하다. 북한과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쟁 초기부터 무기 밀거래와 군복 제공은 물론 전쟁 복구를 위해 북한 근로자를 투입하는 문제를 논의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미국 국무부는 북한 열차역의 적재장면을 담은 위성사진 등을 공개하면서 북러 간 무기 커넥션을 지적해 왔다. 이번에도 열병식 당일인 27일(현지시간) 국무부는 언론 브리핑을 통해 “러시아는 북한의 불법 무기 프로그램을 지지하고 있다”며 군사대표단의 방북을 계기로 한 북러 밀착에 우려를 나타냈다.

문제는 북한의 러시아 편들기가 위험수준을 넘어서고 있다는 점이다. 국제사회의 우려와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듯 김정은 위원장은 노골적인 대러 무기판매 의도를 드러냈다. 러시아 인접국가인 벨라루스를 제외하고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거나 감싸는 건 북한이 사실상 유일하다.

북한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는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국제사회의 지원을 절박하게 요청하고 나선 지난 4월 담화를 내고 “로씨야를 타승할 수 있다는 치유불능의 과대망상증에 걸린 우크라이나 당국”을 운운하면서 비난했다. 김여정 부부장은 앞서 1월에도 담화를 통해 “우리는 로씨야 군대와 인민과 언제나 한 전호에 서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김정은 위원장의 여동생이기도 한 김여정 부부장의 이런 입장은 북한이 국제사회의 보편적 인식과 얼마나 동떨어진 인식과 대응을 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북한의 이런 움직임은 첫째로 국제사회로부터의 비난과 고립을 더욱 심화시킬 수 있다. 푸틴의 침공으로 우크라이나 국민이 고통 받고 어린아이들까지 숨지는 상황에 세계시민이 분노하고 있는 상황에서 젤렌스키를 비아냥거린다면 김정은 위원장과 북한 체제를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은 결코 고울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남북한 사이의 대치를 더욱 첨예하게 만들 수 있다. 한국 정부는 러시아의 부당한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해 유엔 등 국제사회와 보폭을 맞추고 있다. 대러 비난 입장을 유지하면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인도적 지원과 함께 방탄복과 지뢰 탐지 장비 제공 등 비전투 분야의 협력도 추진 중이다. 미국이 요청한 우크라이나에 대한 포탄 지원에도 신중한 입장을 취하면서 전략적 고심을 하는 모습을 보인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그런데 북한이 공개적이고 노골적인 러시아 편들기에 나서면서 남북 사이에 이를 둘러싼 대립각도 더욱 날카로워지는 형국이다.

셋째는 러시아에 대한 예속의 심화다. 북한은 식량난을 비롯한 경제적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중국은 물론 러시아의 지원을 타진해 왔다. 푸틴 대통령은 러브콜을 보내고 있는 북한에 밀가루 등 식량 일부를 지원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북한으로서는 당장 급한 불을 끄기 위해 러시아 측에 대북지원을 요청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 반대급부로 우크라이나 전쟁에 더욱 깊숙이 발을 들여놓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할 공산이 크다. 북러 양측이 공개하지 않은 이번 평양 군사회담의 논의 내용에 관심이 쏠리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김정은 위원장의 각별한 러시아 챙기기는 중국 고위 대표단마저 뒷전으로 밀리는 듯한 모습을 드러냈다. 쇼이구 국방장관의 평양 도착 때 활주로 의장대 환영행사까지 벌어졌고 강순남 국방상과 정경택 군 총정치국장, 박수일 총참모장 등 군부핵심 3인방이 모두 출동하는 예우가 이뤄졌다. 김정은 위원장이 쇼이구를 접견하고 직접 전시장에서 설명까지 한 건 파격에 가깝다. 국회 부의장 격인 리훙중 중국 전인대 상무위원회 부위원장 일행이 27일 축하공연장에서 김정은 위원장을 접견한 것과 비교하면 러시아 쪽을 더 신경 써서 챙긴 건 분명해 보인다.

김정은 위원장으로서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러시아와의 연대를 강화하는 게 전략적으로 남는 장사라고 타산했을 수 있다. 핵과 미사일 도발에 대처한 한미일의 대북압박이 거세지는 상황에서 북중러 연대로 맞서겠다는 생각일 수도 있다. 이런 대립구도는 북한의 잇단 탄도미사일 도발에 대한 유엔 안보리의 대북결의 추진이 러시아와 중국의 거부권으로 번번이 무산되는 데서도 확인된다. 

북한이 처한 절박한 상황으로 볼 때 무기제공이나 인력수출로 벌어들일 수 있는 달러 등 현실적 이익도 무시하기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도를 넘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비난이나 푸틴 체제에 대한 맹목에 가까운 편들기는 결국 북한 체제의 위상을 깎아내릴 뿐이다. 그렇지 않아도 핵과 미사일 도발, 식량난으로 인한 아사자 속출, 주민들에 대한 인권탄압과 가혹한 탈북민 처벌로 국제무대에서 비판받고 있는 김정은 체제가 더욱 막다른 길을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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