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가을이 오면 먼저 제천 청풍호를 찾네. 호수 주변에 있는 밭에서 노랗게 물들어가는 콩잎과 들깻잎 들을 보기 위해서지. 자주 가는 산자락 언덕에 오르면 저 멀리 호숫가 양버들 한 그루가 내려다보이고, 주변 풀과 나무 들이 다양한 색깔로 호수를 물들이고 있는 풍경을 볼 수 있네. "가을은 모든 잎이 꽃이 되는 두 번째 봄"이라는 알베르 까뮈의 말을 실감할 수 있는 곳이지. 언덕에서 호숫가로 내려가면 바람결에 맞춰 흥겹게 몸을 흔들고 있는 물억새들도 만날 수 있고, 운이 좋으면 호수에서 피어오르는 물안개에 나그네의 쓸쓸함을 실어 날려버릴 수도 있어서 좋아. 가을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가보라고 추천하고 싶은 곳이지.

청풍호 주변에는 낮은 산과 언덕이 많아 구절초, 쑥부쟁이, 까실쑥부쟁이, 각시취, 개미취, 산국 등 들국화라고 불리는 꽃들도 흔하네. 호숫가 외딴 곳에서 바람도 없는데 몸을 흔들며

반갑게 맞아주는 구절초나 쑥부쟁이를 보면 천상병 시인의 <들국화>라는 시가 생각나 혼자 웃기도 하지. 어디를 가든 누구에게 환영을 받는다는 건 즐거운 일일세.

“산등성 외따른 데,/ 애기 들국화.// 바람도 없는데/ 괜히 몸을 뒤뉘인다.// 가을은/ 다시 올 테지.// 다시 올까?/ 나와 네 외로운 마음이,/ 지금처럼/ 순하게 겹친 이 순간이-”

하지만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청풍호 풍경을 보면서도 나도 모르게 한숨을 지을 때도 가끔 있네. 이런 풍경을 언제까지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걱정 때문이지. 왜 그런 쓸데없는 걱정을 하냐고? 두 가지 이유 때문이야. 그 중 하나는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가을이 우리를 찾아올지 알 수 없다는 기후변화와 관련된 걱정이네. 지금처럼 한반도 기후변화가 가속화되면 가을이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나버릴 수도 있거든. 가을의 소멸, 정말 소심한 책벌레의 기우일까?

기상청이 2021년 4월 29일에 발표한 「우리나라 109년 기후변화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가을의 시작일이 점점 늦어지고, 가을의 길이도 조금씩 짧아지고 있네. 1912년부터 1940년까지의 30년간 평균 가을 시작일(일 평균기온이 20℃ 미만으로 내려간 후 다시 올라가지 않는 첫날)은 9월 17일이었는데 1991년부터 2020년까지의 30년 평균 시작일은 9월 26일이야. 2011년부터 2020년까지 10년 평균 시작일은 9월 29일이었고. 이제 한반도에서 9월은 가을이 아니고 여름이라는 뜻이지. 시월이 가을의 시작이고.

게다가 지구가열화로 여름은 길어지고 가을은 점점 짧아지고 있네. 1912년부터 1940년까지의 평균 사계절 길이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이 각각 85일, 98일, 73일, 109일이었지만, 1991년부터 2020년까지의 30년 평균은 각각 91일, 118일, 69일, 87일이었어. 2011년부터 2020년까지 10년은 87일, 127일, 64일, 87일이었고. 1912년 이후 110년 동안 여름은 한 달 가까이 늘어나고 가을은 9일 줄어든 거지. 이런 추세라면 머지않아 가을의 길이가 채 두 달이 되지 않을 수도 있어. 그러다가 21세기가 끝날 즈음이면 가을이라는 단어만 사전에 남아있을지도 몰라. 이 땅에 사는 우리 후손들이 기다리고 또 기다려도 가을은 오지 않고……

두 번째 걱정은 일종의 직업병인데, ‘풍경의 사유화와 상품화’때문이야. 1년이면 서너 번 청풍호를 찾는데, 올 때마다 급격하게 바뀐 주변 풍경에 놀라곤 해. 전원주택, 카페, 펜션, 레스토랑, 호텔 등이 계속 늘어나고 있거든. 경치 좋은 장소의 사유화이고 아름다운 풍경의 상품화야. 요즘 대한민국 어디를 가도 쉽게 볼 수 있지. 비싼 커피와 빵을 파는 대형 카페들이 대표적인 보기이고. 슬프게도 이 나라는 이미 아름다운 풍경도 돈이 있어야 즐길 수 있는 천박한 세상이 되어버리고 말았어. 그러니 그림처럼 황홀한 청풍호 풍경을 내려다보면서 이곳이 얼마나 더 자본의 유혹을 견디어낼 수 있을지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지.

다 쓸데없는 노인의 기우라고? 그럴지도 몰라.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야 짧아도 가을이라는 계절은 남아 있고, 대한민국의 아름다운 가을 풍경들이 모두 사유화되지는 않을테니까. 그러니 더 늦기 전에 올해도 여느 해처럼 이 금수강산을 울긋불긋 물들일 단풍들을 찾아가 가을을 즐겨야겠지. 그런 걸음에 이런 짧은 시 하나 있으면 더 흥이 오를 게고. “이슬걷이 풀밭 거닐다/ 대자연의 미소에 홀려/ 까르르륵 ~ 길 잃었는데/ 걱정이 없다/ 혹시/ 걱정도 잃어버렸을까?”최계선의 <그 미소에 길을 잃다>라는 짧은 시인데, 대자연의 미소가 보이지. 앞으로 한 달, 그 미소에 홀려 길도 잃고 걱정도 다 잊고 잃어버리는 황홀한 시간을 갖고 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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