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종 한국국가전략연구원 북한연구센터장북한학 박사
이영종 한국국가전략연구원 북한연구센터장북한학 박사

‘덕필유린(德必有隣)’이란 가르침이 있다. 공자의 저서 논어 이인편(里仁)편에 나오는 ‘덕불고필유린’에서 따온 것으로, 덕이 있으면 외롭지 않아 이웃이 있다는 말이다. 사람은 물론 단체·국가 등도 가까운 이웃과 잘 지내는 게 최고의 덕목이란 의미이기도 하다.

최근 북한이 잇달아 해외공관을 줄이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아프리카 우간다와 앙골라에 이어 홍콩 주재 총영사관까지 줄이겠다는 통보를 해당국에 했다는 외신보도가 이어진다.

유럽 외교의 거점 중 하나인 스페인 주재 대사관도 곧 문을 닫겠다는 계획인데, 현지 우호세력인 스페인인민공산당(PCPE) 측에 서윤석 임시 대리대사가 먼저 알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스페인 대사관의 경우 북한으로서는 이런저런 좋지 않은 일들을 겪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핵과 미사일 도발이 한창이던 2017년 스페인은 대북제재 동참 차원에서 당시 대사이던 김혁철을 외교적 기피인물인 ‘페스소나 논 그라타’로 지목했다. 사실상 현직 대사를 추방하는 조치를 취한 것이다.

2019년에는 크리스토퍼 안이 이끄는 반북단체인 자유조선 측이 스페인 대사관을 습격해 직원들을 가둔 채 컴퓨터와 USB, 관련 자료 등을 탈취했다. 북한의 해킹범죄 등에 대응한다는 취지였지만 암호체계와 비밀서류를 북한 민주화를 주도하는 단체에 고스란히 털린 북한으로서는 큰 충격을 받았을 게 틀림없다.

아프리카 외교는 북한이 김일성 시기부터 공들여왔다. 비동맹 외교를 통해 한국과의 외교경쟁에 맞서려는 심산이었고 한때 아프리카는 북한의 든든한 외교적 버팀목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그 효용이 떨어지자 공관 감축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통일부 등 우리 정부 관련 부처에 따르면 북한의 수교국은 159개국에 이른다. 하지만 공관을 설치한 곳은 50개 안팎에 불과하다. 대개 외교관계만 수립해 놓거나 지역의 1~2개 거점 대사관의 대사가 여러 국가를 겸임하는 방식으로 운영해 왔다고 한다.

북한이 공관 숫자 줄이기에 나선 직접적인 이유는 경제난 때문으로 분석된다. 고위 탈북 외교관들은 북한이 해외 공관에 건물임대료나 대사관 직원들의 급여와 체류비 등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자체적으로 자금을 조달해 공관을 운영하도록 하는데 현지에 파견된 식당이나 건설업체, 근로자 등에게 상납 받거나 도움을 받는 방식이 주로 쓰인다고 한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제대로 된 외교활동은 어려울 수밖에 없고 먹고살고 아이들 학교 보내는 등의 최소한의 활동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한 탈북 외교관은 “어쩌다 병이 나거나 해서 현지 외교관 전용병원이나 국제병원 등을 이용하려면 너무 비싸 주재국 측에 도움을 요청하기도 한다”며 “상대 외교관에게 매우 민구스러운 상황이 된다”고 말했다.

공관 폐쇄 조치의 더 근본적인 배경은 외교적 고립이라 할 수 있다. 김정은 체제 들어 핵 개발과 미사일 도발에 올인하면서 북한은 국제 외교무대에서 골칫거리로 등장했다. 김일성·김정일 집권 시기에도 평판이 좋은 건 아니었지만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호전적인 행보가 국제사회의 실망감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는 얘기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최근 들어 러시아와의 군사·외교적 밀착에 골몰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침공을 계기로 서방을 중심으로 한 국제사회로부터 비난받고 있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편에 자리함으로써 무기 수출과 대북 군사정찰위성 기술 제공 등을 챙기려 하는 것이다. 지난 9월 13일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에서 열린 북러 정상회담은 이를 잘 보여준다.

하지만 푸틴의 곁에는 밸라루스 외에 변변한 이웃국가가 없는 상황이다. 여기에 북한이 동참하면서 푸틴 입장에서는 어느 정도 효용성이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침공을 정당화 하면서 푸틴 대통령과 러시아를 일방적으로 감싸는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북한의 언동은 국제사회와 외교가로부터 지탄을 받고 있다.

지난달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일대일로 정상회의를 열었고, 이에 맞춰 푸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다. 하지만 시진핑은 우크라이나 사태를 의식한 듯 푸틴과 미국에 대한 대응과 한미일 공조 등에 맞서는 기조를 내비치면서도 푸틴과 한배를 타는 건 꺼리는 모습을 보였다. 

북러 정상회담 개최에 대한 중국 지도부의 냉랭한 기류나 시진핑 주석의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러시아 밀착이 순탄치 않을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음 달이면 집권 12년을 채우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한국과 미국, 중국과 러시아 최고지도자와 정상회담을 했다. 하지만 시진핑 주석의 일대일로 정상회의는 물론 여타의 다자간 정상회담 무대에 서지 못했다. 

평양의 집무실에서 위성TV로 윤석열 대통령의 외교행보를 지켜본다면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표정은 일그러질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세계 각국의 정상들이 앞다퉈 인사를 나누려 하고 한국의 반도체와 첨단 방산무기를 세일즈하면서 한류를 전파하는 모습에서 부러움과 함께 심한 열패감을 느낄 것이란 점에서다.

해방과 분단을 겪으면서 대한민국은 눈부신 발전을 이룬 데 반해 북한은 경제적 파산과 국제적 고립만 심화시켜 왔다. 그 원인이 북한 사회주의 체제의 비효율성, 더 근본적으로는 김씨 일가의 3대 세습과 폭압적 독재에 있다는 건 불문가지다.

남은 50개 안팎의 해외공관만이라도 유지하고, 이웃국가와 최소한의 외교관계라도 유지하려면 그 출발은 비핵화와 미사일 프로그램의 포기가 돼야 한다. 핵과 미사일을 거머쥔 북한과 상대하려 할 국가는 지구상 그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전으로 사면초가의 고립 상황에 처한 푸틴 대통령을 빼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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