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사진 공부를 시작할 때 가졌던 소망 중 하나는 함께 늙어가는 친구들의 사진으로 책을 만들어 나눠 갖는 것이었네. 그래서 모임이 있거나 함께 여행할 기회가 있으면 친구들의 얼굴과 행동을 열심히 담았어. 사진 공부를 시작한 지 10년째가 되는 올해 봄과 가을에 그렇게 찍은 사진들을 골라 <에트랑제, 고맙다>와 <산에 오르다>라는 제목으로 수제(手製) 사진집을 두 권 만들었지. 하나는 고등학교 친구들, 다른 하나는 대학 친구들을 찍은 거야.

지금 두 사진집 속에 있는 친구들의 친숙한 얼굴 보면서 이 글을 쓰고 있네. ‘50여 년 동안 외롭지 않게 옆에 있어줘서 고맙다’고 말하니 그들도 모두 좋다는 듯 웃고 있구먼. 사진이라는 이미지를 통한 간접적인 만남이지만 오랜 세월 희로애락을 함께한 친구들 얼굴이라 그런지 모두 실제 나이보다 더 젊고, 더 잘생겨 보여서 좋아. 그러면 나도 덩달아 더 젊고, 더 미남처럼 보이거든.

친구들 얼굴 한 장 한 장 넘겨보면서 웃고 울다가, 조선 후기의 문인이었던 이덕무의 산문집 『선귤당농소(蟬橘堂濃笑)』에 나오는 글이 떠올랐네. 카메라 보기창(뷰파인더)으로 친구들 얼굴을 바라볼 때, 인화된 사진들을 손수 바느질해서 힘들게 수제 사진집을 만들 때에도 자주 떠올렸던 청정관(靑莊館)의 글이야. 읽고 또 읽어도 싫증나지 않는 아름다운 글이니 큰소리로 함께 읽어 보세.

“만약 한 사람의 지기(知己)를 얻는다면 나는 마땅히 십 년 동안 뽕나무를 심을 것이고, 일 년 동안 누에를 길러 손수 다섯 가지 색의 실을 염색할 것이다. 열흘에 한 가지 색의 실을 염색한다면 오십 일 만에 다섯 가지 색의 실을 염색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오색의 실을 따뜻한 봄날 햇볕에 쬐어 말리고, 아내에게 부탁해 수없이 단련한 금침으로 내 지기의 얼굴을 수놓게 해 기이한 비단으로 장식하고 고옥(古玉)으로 축을 만들 것이다. 그것을 높게 치솟은 산과 한없이 흐르는 물 사이에 걸어 놓고 서로 말없이 마주하다가 해질녘에 가슴에 품고 돌아올 것이다.” (한정주 엮고 옮김, 『문장의 온도』, 251쪽)

여기서 지기(知己)는 지기지우(知己之友), 즉 서로 뜻이 통하는 친한 벗이야. 지음(知音)과 비슷한 뜻이지. 이덕무는 이 짧은 글에서 자신을 알아주는 진짜 친구를 얻게 되면, 10년간 뽕나무를 심고 1년간 누에를 쳐서 만든 오색실로 친구의 얼굴을 수놓은 다음, 기이한 비단 장식을 하고 고옥으로 축(軸)을 한 두루마리를 만들겠다고 말하네. 그러다가 친구가 보고 싶으면 이 두루마리를 높은 산과 맑은 강물 사이에 펼쳐 놓고 서로 말없이 마주 보다가, 해가 지면 품에 꼭 안고 돌아오겠다고 말하지. 이런 이덕무의 마음이 너무 아름답지 않는가? 나는 이 글을 읽을 때마다 마지막 부분에서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마네. 해질녘 친구의 사진을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 모습이 눈에 희미하게 보이거든. 청정관처럼 나도 책만 보는 바보, 간서치(看書癡)라서 그럴까.

우정도 세명리(勢名利)를 얻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전락해 버린 지 오래일세. 중국 남조 양(梁)나라의 문인이었던 유준(劉峻)이 <광절교론 廣絶交論>에서 말했던 소교(素交)는 사라지고 장사치의 우정인 이교(利交)만 남았어. 권세 있는 사람에게 붙는 세교(勢交), 재물 있는 자에게 알랑거리는 회교(賄交), 입으로만 살살거리는 담교(談交), 궁할 때는 찾다가 한순간에 등을 돌려 제 잇속을 차리는 궁교(窮交), 이익이 될까 아닐까를 재는 양교(量交) 모두 장사치의 우정이야. 우정의 근본은 사랑인데 이런 사귐도 우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난 어렸을 적부터 친구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좋았네. 가식이 없고 순결한 사귐인 소교(素交)만 알고 살았어. 그래서 칠순이 지난 나이에도 이덕무의 글이 아름답게 다가오는지도 몰라.

이번에 친구들 사진집을 서둘러 만들었던 이유 중 하나는 이제 예전처럼 자주 볼 수 없기 때문이네. 일흔이 넘은 노인이 되면 이런저런 이유로 만나는 기회가 줄어들 수밖에 없거든. 그래서 누구나 늙으면 혼자 지내는 법을 익혀야 하는 거야. 외로움과도 친해져야 하고. 마지막으로 이덕무가 즐겼던 혼자 노는 법을 소개하네. 오래 전부터 내가 실천하고 있는 방법이기도 해. 내 옆에는 이덕무에게는 없는 카메라가 항상 있다는 게 다를 뿐이야.

“모름지기 벗이 없다고 한탄하지 말고 책과 더불어 어울리면 된다. 책이 없을 경우에는 구름과 안개가 나의 벗이 되고, 구름과 안개조차 없다면 바깥으로 나가 하늘을 나는 비둘기에게 마음을 의탁한다. 하늘을 나는 비둘기가 없으면 남쪽 동네의 회화나무와 벗 삼고 원추리 잎사귀 사이의 귀뚜라미를 감상하며 즐긴다. 대개 내가 사랑해도 시기하거나 의심하지 않는다면 모두 좋은 벗이 될 수 있다.” (한정주 엮고 옮김, 『문장의 온도』, 2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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