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 ‘북극협력주간 2023-극지의학회’
극한의 극지 의료 현장… 혼자서 85명의 건강 담당
줄어드는 지원자 수… 극지 의사 처우 개선 및 지원 절실 

지구의 끝단의 극지는 전 세계 과학자들이 모이는 연구 성지다. 이 극한 환경에서 연구원들의 안전을 지키는 존재가 있다. 바로 ‘극지 의사’들이다./ 대한극지의학회
지구의 끝단의 극지는 전 세계 과학자들이 모이는 연구 성지다. 이 극한 환경에서 연구원들의 안전을 지키는 존재가 있다. 바로 ‘극지 의사’들이다./ 대한극지의학회

시사위크=박설민 기자  지구 끝단의 얼어붙은 극지(極地) ‘남극’과 ‘북극’은 과학 연구의 보고다. 수백만 년에 걸쳐 축적된 지구의 역사는 두꺼운 빙하 깊은 곳에 잠들어있다. 수많은 과학자들이 극지를 과학 연구의 로망이자 연구의 종착지라고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허락된 자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 불리는 극지는 온갖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살을 에는 추위, 위험한 빙하 지형, 야생동물들, 눈폭풍 등은 연구원들의 생존을 위협한다. 한번 들어가면 최소 한 달에서 1년을 지내야하는 고립성도 인간을 정신적 한계로 몰아붙인다.

이 같은 극한 환경에서 연구원들의 안전을 지키는 존재가 있다. 바로 ‘극지 의사’들이다. 극지 의사들은 뛰어난 의료 능력뿐만 아니라 강한 체력과 정신력, 의사로서의 사명감이 필요한 인재들이다. 우리나라의 장보고과학기지, 다산과학기지, 세종과학기지 등 연구기관에서도 극지 의사들은 낮밤가리지 않고 연구원들의 건강을 책임지고 있다.

이에 <시사위크>에서는 한국 극지 연구 최고의 서포터인 극지 의사들을 만나 그들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대한극지의학회’ 발표를 통해 이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봤다.

◇ 극지 의사는 놀면 놀수록 좋다

“극지 의사는 바쁘지 않아요. 놀면 놀수록 모두에게 좋습니다. 하지만 이게 의사들이 게으르거나 할 일이 없어서가 아니에요. 여기선 바쁘면 큰일이 터졌다는 걸 의미하기 때문이죠.”

10일 부산항국제전시컨벤션센터에서 개최된 ‘북극협력주간 2023-극지의학회’ 발표에서 고보람 내과전문의는 이 같이 말했다. 고보람 전문의는 북극을 4번, 남극을 3번 다녀온 ‘극지 베테랑’이다. 2015년부터 한국의 극지 탐사선 ‘아라온호’의 선의로 근무했다. 

아라온호는 극지연구소에서 운영 중인 국내 유일의 쇄빙선이다. 2009년 6월 11일 진수한 이후 남·북극 결빙 해역에서의 독자적인 극지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남극의 세종과학기지, 장보고과학기지, 북극다산과학기지 등 우리나라 극지연구기지에 대한 보급 역할도 수행한다.

아라온호에 승선하는 인원은 총 85명. 25명의 승조원과 60명의 연구원들로 구성된다. 이 중 선의는 ‘1명’. 혼자서 일당백의 진료를 보는 것이다. 때문에 의사들은 항상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아라온호에 승선한다. 아라온호 병동 내에는 중형 침대 3대와 수백여 가지 약품종이 구비돼있다. 타이레놀, 소화제 등 일반 상비약부터 코데인 등 마약성 진통제, 중병 치료제까지 종류도 가지각색이다. 하지만 고립된 지역에서는 자그마한 연고조차 아쉬울 때가 많다고.

아라온호 병동에 상비된 의약품들의 모습 소화제, 타이레놀부터 중증 치료제까지 다양한 의약품이 구비돼 있다./ 대한극지의학회
아라온호 병동에 상비된 의약품들의 모습 소화제, 타이레놀부터 중증 치료제까지 다양한 의약품이 구비돼 있다./ 대한극지의학회
아라온호 내부의 병동 모습. 작은 병원처럼 보이는 이곳은 1명의 의사가 관리하고 있다./ 대한극지의학회
아라온호 내부의 병동 모습. 작은 병원처럼 보이는 이곳은 1명의 의사가 관리하고 있다./ 대한극지의학회

물론 일 자체는 많은 편이 아니다. 2013년부터 2018년까지 총 778일 동안 기록된 아라온호의 의료 기록을 종합해보면 진료를 받은 환자의 수는 총 1,318명. 하루 1.78명의 환자를 의사가 돌본 셈이다. 대한의사협회에 따르면 일반 의사가 하루 평균 담당하는 환자 수는 34.2명이다. 이와 비교하면 업무량은 적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극지에서의 의사는 ‘바쁘지 않을수록, 놀면 놀수록 좋다’는 것이 고보람 전문의의 말. 극지의 위험한 환경은 항상 부상의 위험이 따른다. 사고나 질병이 발생할 경우 일반 지역에 비해 훨씬 더 위험할 가능성도 높고 환자의 회복도 쉽지 않다. 또 자원도 한정적이기 때문에 내륙에 비해 의료 활동도 한계가 있다. 때문에 의사가 바쁘지 않다는 것은 곧 연구원들이 평화롭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보람 전문의는 “극한 환경에서 작업하는 경우가 많아 환자 유형에는 근골격계질환이 25.5%로 가장 많고 멀미하시는 분들도 많았다”며 “하지만 멀미의 경우 연구원이나 승조원분들이 자기한테 잘 맞는 약을 가져올 정도로 익숙해 병동을 찾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말했다.

이어 “2021년도에 북극 항해를 갔을 때 코로나19 때문에 굉장히 많은 걱정을 했음에도 올바른 격리 조치와 위생 관리로 환자가 한 번도 발생하지 않았다”며 “당시 의무적으로 3주마다 진단키트검사를 진행해 철저한 관리 체계를 유지했다”고 말했다.

극지 환경은 항상 사고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작은 배의 흔들림이나 바람도 큰 부상으로 이어질 수 있어 극지 의사들은 늘 긴장하고 있다./ 대한극지의학회
극지 환경은 항상 사고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작은 배의 흔들림이나 바람도 큰 부상으로 이어질 수 있어 극지 의사들은 늘 긴장하고 있다./ 대한극지의학회

◇ 극한 현장의 의료, 모든 것이 변수

그러나 일단 ‘큰일’이 발생하면 상황은 달라진다. 연구원이나 승조원이 큰 부상을 입을 경우 육지 병원과는 차원이 다른 압박감을 느끼게 된다. 의사 혼자서 모든 치료를 담당해야 하고 의료시설과 자원도 상대적으로 부족할 수밖에 없어서다. 특히 ‘구조 요청’의 어려움은 극지 의사들에게 가장 큰 어려움이다. 지형 특성상 환자 후송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구조 요청을 한다 해도 구조대 도착까지 길면 한 달이 걸릴 수도 있어서다. 

고 전문의가 아라온호에서 근무할 당시 장보고과학기지에서 아라온호로 환자 한 명을 이송했다. 중장비 대원이었던 이 환자는 심한 두통과 함께 한쪽 눈꺼풀 마비 증상을 호소하고 있었다. 진단명은 ‘뇌동맥류 파열 임박’. 쉽게 말해 머릿속 동맥이 터지기 직전이었다.

상황이 심각한 만큼 빠르게 대형병원으로의 후송이 필요했다. 하지만 극지의 날씨 상황, 비행스케줄 등을 고려했을 때 비행기 후송은 불가능했다. 가장 빠른 것은 배를 타고 후송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아라온호는 환자를 싣고 가장 가까운 대형병원이 있는 국가인 뉴질랜드로 향했다.

그때부터 고 전문의는 온 신경을 환자 진료에 쏟았다. 뇌압을 낮추기 위한 응급처치 및 약처방과 함께 수면 자세 관리 등의 조치를 병행했다. 배 위의 분위기 관리에도 집중했다. 환자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승조원과 연구원들의 불안감이 커질 수 있어서다. 때문에 아라온호 선장과 이야기하며 최대한 빠른 항해 루트를 요청했다. 그 결과 6일 만에 뉴질랜드 병원에 도착, 환자는 무사히 치료를 받아 회복할 수 있었다.

한정된 의료 자원도 극지 의사들을 힘들게 하는 존재다. 고 전문의가 아라온호에서 근무하던 어느 날, 병동에 급박한 전화가 걸려왔다. 큰 파도로 배가 흔들리면서 조리원 한 명이 다리를 크게 다쳤다는 것이다. 조리실로 뛰어 내려가니 환자의 상태는 심각했다. 통증이 너무 심해 병동으로 옮기는 것조차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큰 병원에서 쓸 만한 강력한 마약성 진통제가 없어 코데인 정도로 버텨야 했다.

더 큰 문제는 배 위에 구비된 들것이 아무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고 전문의와 승조원들은 환자를 들것에 싣고 조리실 밖으로 옮기려고 했다. 하지만 좁은 배의 통로에 들것이 걸려 움직일 수 없었다. 때문에 짐을 옮길 때 사용하는 수레에 이불, 쿠션 등을 엮어 간이 들것을 만들어 환자를 옮겨야 했다.

고 전문의는 “극지에서는 사고 발생의 예측도 힘들고 평상시 당연하다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위험 요소로 다가올 수 있다”며 “ 때문에 극지 의사들에게 진료 기록은 집단 지성을 모을 수 있는 가장 큰 힘”이라고 말했다.

대한극지의학회는 초대회장 김한겸 고려대 의과대학 명예교수는 극지 의료질 향상의 열쇠는 ‘기록’이라고 강조했다./대한극지의학회
대한극지의학회는 초대회장 김한겸 고려대 의과대학 명예교수는 극지 의료질 향상의 열쇠는 ‘기록’이라고 강조했다./대한극지의학회

◇ 줄어드는 인력, “인재 확보와 첨단 장비 도입 필요”

극지 의사들은 지금도 극한의 환경 속에서 우리나라 연구원들이 최고의 성과를 낼 수 있도록 뒷받침해주고 있다. 그러나 앞서 소개한 고 전문의의 사례처럼 극지에서의 의료 임무는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때문에 전문가들은 극지 의사들의 지원 및 의료 품질 향상을 위한 방안 마련이 시급하다고 강조한다.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고자 결성된 단체가 ‘대한극지의학회(KSPM)’다. 2014년 6월 21일 창립한 대한극지의학회는 초대회장 김한겸 고려대 의과대학 명예교수를 중심으로 남·북극 극지를 파견 다녀온 극지 의사들이 모여 설립했다. 현재 극지 파견 월동대 및 연구자들의 건강과 응급상황 대응, 의학연구 및 지원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먼저 대한극지의학회 전문가들이 강조한 극지 의료질 향상의 열쇠는 ‘기록’이다. 극지 파견 연구원 및 승조원들의 경우 핵심 인원은 장기간 유지가 되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이들의 진료 내용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면 긴급 상황 예방 및 대응이 한층 더 수월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김한겸 대한극지의학회 초대회장은 이날 발표에서 “2021년쯤 극지 진료 기록을 살펴봤는데 20년 간의 기록이 사실상 전무한 실정”이었다며 “이는 누군가 책임을 져야하지 않을까 할 정도로 무책임한 일”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김 초대회장은 “극지에 파견 가는 의사 숫자가 1명인 것도 개선돼야 할 문제”라며 “만약 의사가 다치거나 아플 경우 이를 보완할 수 있도록 2명의 의사를 극지에 파견해야 한다고 제안한다”고 의료진 확충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다만 안타깝게도 극지 의사들의 지원이 감소하는 실정이다. 힘든 근무 환경과 12~13개월씩 고립돼 있는 환경을 최근 젊은 세대 의사들이 선호하지 않아서다. 최근 남극대륙 코리안루트 개척 탐사팀에 파견을 다녀온 한 전문의는 “예전엔 극지 의사 경쟁률은 3~5대 1 정도였으나 요새는 1명도 간신히 채우는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정진호 대한극지의학회 총무이사는 “극지연구소와 대한극지의학회도 내과 전문의 1명, 외과 전문의 1명 정도를 파견하는 것이 이상적이지만 현실적인 여건상 지금 거의 한 팀에 의사 1명도 지금 겨우 데려갈 수 있는 수준”이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극지에서 활동하는 의사의 피로도도 계속 높아지고 있다”고 우려했다.

아울러 우수한 의료 인프라 확충의 필요성도 제기됐다. 김 초대회장은 “남극세종과학기지를 연구원들을 위한 의료 검사 시스템 허브로 만드는 것이 또 다른 꿈”이라며 “우리나라 연구원들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 기지 연구원들의 건강 검사도 책임질 수 있는 우수한 극지 의료 인프라를 확충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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