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종 한국국가전략연구원 북한연구센터장북한학 박사
이영종 한국국가전략연구원 북한연구센터장
북한학 박사

“대한민국이라는 실체를 이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가장 적대적인 국가로 규제해야 할 역사적 시기가 도래했다.”

지난 10일, 북한 관영 선전매체인 조선중앙통신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8~9일 이틀간 주요 군수공장을 방문한 사실을 보도하면서 그의 이 같은 발언 내용을 전했다.

지난해 말 노동당 전원회의에서 남북관계를 ‘적대적인 두 국가 관계’로 설정한 이후 대남 도발 위협의 수위를 한껏 끌어올리고 있는 김정은 위원장의 일련의 언급에서는 이미 ‘헤어질 결심’을 굳힌 기류가 감지된다. 더 이상 남측에 기대할 것이 없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오빠의 이런 강경발언에 맞장구를 치고 나선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의 언급에서는 더 구체적인 북한의 불만 배경이 드러난다. 김여정 부부장은 지난 2일 담화에서 “문재인, 참 영특하고 교활한 사람이었다”며 “어리숙한체하고 우리에게 바투 달라붙어 평화보따리를 내밀어 우리의 손을 얽어매어놓고는 돌아앉아 제가 챙길 것은 다 챙겼다”고 비난했다.

김여정 부부장은 지난 2018년 2월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김정은 위원장의 특사로 청와대를 방문해 문재인 당시 대통령과 만났다. 웃음 가득한 얼굴로 화해·협력의 사절인 것처럼 등장했던 그가 지금은 대남 공격수로 변신한 것이다.

담화에서 김여정 부부장이 쏟아낸 불만은 2018년 9월 평양 남북 정상회담에서 북한이 문 전 대통령에게 평양 주민을 상대로 한 대중연설 자리를 마련해주고 카퍼레이드와 백두산 방문 등 환대를 했는데도 결국 뒷통수를 맞았다는 인식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사사건건 날을 세워온 윤석열 대통령과 현 정부에 대한 비난을 넘어 문재인 전 대통령에게까지 직격탄을 날린 건 김정은 위원장과 북한 지도부의 대남감정이 상할 대로 상했다는 걸 의미한다.

북한은 김정은 위원장의 연말 전원회의 발언을 통해 이런 입장을 정리한 것으로 분석된다. 그가 “우리 제도와 정권을 붕괴 시키겠다는 괴뢰들의 흉악한 야망은 ‘민주’를 표방하던, ‘보수’의 탈을 썼든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고 언급한 건 보수 성향의 현 정부는 물론 문재인 정부와 김대중·노무현 정부에게까지 싸잡아 비난의 화살을 쏜 것으로 볼 수 있다.

자신들의 ‘결연한’ 의지를 드러내 보이겠다는 듯 김정은 위원장과 김여정 부부장은 말폭탄 뿐 아니라 구체적이고 가시적인 행동을 부각시키려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다. 최선희 외무상을 내세워 남북관계를 담당해온 조직과 기구를 폐지하거나 조정하는 등의 작업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남북관계를 ‘대적(對敵)관계’로 규정한데다 ‘적대적인 국가 대 국가’로 이끌고 가겠다고 밝힌 만큼 노동당 통일전선부나 조국평화통일위원회, 통전부 산하의 아태평화위원회 등이 필요 없다는 게 김정은 위원장의 생각인 듯하다.

김정은 위원장이 이처럼 대남 비난과 위협으로 대립각을 세우면서 한반도 긴장 조성에 나서는 건 남북관계 경색의 책임을 한국 정부에게 전가하고 대북정책의 수정을 요구하려는 뜻으로 보인다. 집권 이후 핵과 미사일 도발에 올인하면서 대북제재를 자초했고, 식량난 등 경제적 어려움이 여전한 상황에서 엘리트와 주민의 불만이 고조되는 걸 회피하려는 의도도 엿보인다.

연초부터 서해 북방한계선(NLL) 인근 수역에서 포격도발을 연이어 감행하는 등의 움직임으로 볼 때 올해 도발 수위를 한껏 올려 우크라이나 전쟁이나 중동 쪽에 쏠린 미국의 관심을 끌어보려는 것이란 분석도 가능하다. 오는 11월 미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귀환하기를 갈망하고 있을 김정은 위원장의 전략적 포석일 가능성도 크다.

하지만 김정은 위원장의 ‘남북관계 결별’은 쉽지 않은 측면이 있다. 오랜 역사적 맥락을 갖고 있고 실질적인 성과 축적 또한 만만치 않다는 점에서 홧김에 파탄내거나 단박에 쾌도난마식으로 처리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김정은 위원장이 남북관계를 ‘국가 대 국가’로 가져가겠다는 발상도 기존의 기존이나 합의에 정면 배치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일성 집권 시기인 1991년 12월 체결된 남북기본합의서에는 남북관계를 ‘나라와 나라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잠정적 특수관계’라고 규정하고 있다. 또 2000년 6월 김대중 당시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합의·서명한 6.15공동선언은 북한의 요구에 따라 ‘우리민족끼리’ 정신이 문구로 담겨있다.

김정은 위원장의 의향이나 말대로 남북관계를 국가관계로 가져가려 한다면, 이는 남북기본합의나 6.15선언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행위가 된다. 무엇보다 할아버지·아버지이자 선대 수령인 김일성과 김정일의 ‘치적’으로 간주돼온 사안을 김정은 위원장이 뒤집어엎는 모양새가 될 수 있다.

김정은 위원장은 전원회의 연설에서 “장구한 북남관계를 돌이켜보면서 우리 당이 내린 총적인 결론은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 두 개 제도에 기초한 우리의 조국통일 노선과 극명하게 상반되는 흡수통일, 체제통일을 국책으로 정한 대한민국 것들과는 그 언제 가도 통일이 성사될 수 없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수사적 차원의 대남 비방이나 책임 떠넘기기가 아니라면 김정은 위원장은 대남비방에 열을 올리기보다는 자신의 현주소를 심사숙고해 보는 게 좋다. 특히 핵과 미사일을 거머쥐고서도 주민들은 식량 부족에 시달리고, 탈북민이 넘쳐나는 현실은 김정은 위원장이 관영 선전매체를 통해 쏟아내는 미사여구와 허황된 전망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을 엄중히 받아들였으면 한다.

마침 지난 8일 40회 생일을 맞았다는 점에서 불혹의 나이가 갖는 의미를 되새겨볼 필요가 충분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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