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동백꽃을 보러 선유도와 안면도에 다녀왔네. 동백은 따뜻한 곳을 좋아해서 남서부 해안과 섬에서 많이 자라는 나무일세. 서울 근교에서 볼 수 있는 동백나무들은 대부분 원예종이거나 꽃이 질 때 꽃잎이 하나하나 지저분하게 떨어지는 애기동백 종류이지. 동백나무를 굳이 카멜리아(Camellia)라는 속명으로 부르는 사람들도 많은데, 그게 별로 고상한 외국어도 아니네.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가 원산지인 동백나무를 유럽에 소개했던 체코 출신 식물학자인 카멜(Georg Josef Kamel)의 라틴어 이름일 뿐이야. 동백(冬柏)은 동아시아 중 우리나라에서만 사용하는 이름이라는군.

나는 동백꽃의 존재를 이미자 씨가 불렀던 대중가요 <동백아가씨>를 통해 알게 되었네.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 아가씨/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 어렸을 때 라디오에서 이 노래가 나오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따라 불렀지. 물론 동백꽃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랐어. 그러면서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누군가를 그리워하면서 눈물까지 흘렸으니 참 묘하지. 어렸을 적부터 감수성이 꽤 풍부했던 것 같아. 지금도 동백꽃을 보면 그때 일이 생각나서 혼자 웃어. 하지만 아직 싱싱한 진한 붉은색 꽃잎과 노란 꽃술을 가진 꽃이 통째로‘툭’떨어지는 모습을 보면 지금도 가슴이 아려오는 것은 사실이야.

내가 동백꽃을 처음 본 것은 50대 중반 이후 섬에 다니면서야. 제주도 올레길과 금오도 비렁길을 걸으면서 많은 동백꽃들을 만났지. 책에서만 읽었던 동박새가 동백나무에서 이 꽃 저 꽃 옮겨 다니면서 꿀을 빠는 모습도 직접 보았어. 동박새의 깃털과 부리를 노랗게 물들이고 있는 동백꽃의 꽃가루들을 보면서 알았지. 동백꽃과 동박새 관계가 전략적 제휴를 통해 공생하는 친구 사이라는 것을. 동백꽃은 곤충이 보기 드문 겨울에 동박새에게 꿀을 제공하고, 동박새는 그 대가로 꽃가루받이를 해주는 거지. 동백꽃의 꽃술 모양과 동박새의 부리 생김새를 보면서 공진화(公進化)가 뭔지도 알게 되었어.

무엇보다도 노년에 동백꽃을 통해 얻은 가장 귀중한 가르침은 말년의 처세에 관한 거야. 싱싱한 꽃봉오리 통째로 땅에 떨어진 동백꽃들을 보고 있으면 떠나야 하는 자의 아름다운 뒷모습을 생각하게 되거든. 그럴 때마다 떠오르는 시가 문정희 시인의 <동백꽃>일세.

“나는 저 가혹한 확신주의자가 두렵다// 가장 눈부신 순간에/ 스스로 목을 꺾는/ 동백꽃을 보라// 지상의 어떤 꽃도/ 그의 아름다움 속에다/ 저토록 분명한 순간의 소멸을/ 함께 꽃 피우지는 않았다// 모든 언어를 버리고/ 오직 붉은 감탄사 하나로/ 허공에 한 획을 긋는/ 단호한 참수// 나는 차마 발을 내딛지 못하겠다/ 전존재로 내지르는/ 피묻은 외마디의 시 앞에서/ 나는 점자를 더듬듯이/ 절망처럼/ 난해한 생의 음표를 더듬고 있다”

내가 알고 있는 꽃들 중 가는 모습이 가장 아름다운 게 동백꽃이야.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끝나면 전혀 망설이지 않고 봉오리 채 뚝 땅으로 떨어지지. 절명(絶命)의 미의 극치라고나 할까. 시인의 말처럼 ‘가장 눈부신 순간에 스스로 목’을 꺾어. 그래서 난 동백나무 숲에 가면 위도 쳐다보지만 아래도 꼭 내려다보네. 땅에 떨어진 꽃이 더 싱싱할 때도 있거든. 박노해 시인의 말대로 동백꽃은 세 번 피는 게 맞아. 푸른 나무 위에서 피고, 떨어진 후에는 땅에서 한 번 더 피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동백꽃을 바라보는 사람의 가슴에 붉게 다시 피고. 며칠 전 안면도 안면암 장독대 옆에서 천수만을 바라보며 붉은 사랑을 토해내던 동백꽃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네.

이제는 싫든 좋든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이형기, <낙화>) 아름다운 뒷모습을 상상하면서 살아야 할 나이일세. 동백꽃처럼‘가혹한 확신주의자’로 살다 가야겠다고 자주 다짐하네. 그만 둘 때가 되었는데도 돈과 권력과 명예에 대한 노욕 때문에 자리에 연연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요즘 양대 정당에서 국회의원 한 번 더 해보겠다고 이 당 저 당 철새처럼 옮겨 다니는 노정객(老政客)들 보면 참 비루하고 던적스럽다는 생각이 들어. 그들이 문정희 시인이 <동백>에서 “가장 눈부신 꽃은/ 가장 눈부신 소멸의 다른 이름이라.”고 했던 말을 알면 그런 추태는 보이지는 않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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