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지난 편지에서 올해 겨울철 전국 강수량이 역대 1위를 기록했고, 비나 눈이 온 날도 가장 많았다는 기상청 발표를 언급하면서 겨울에 햇빛 보기가 쉽지 않았다는 불평을 했지. 3월에도 흐리거나 비 오는 날이 예년에 비해 많았던 것 같네. 그래서 일부 지방자치단체들이 준비한 벚꽃 축제가 꽃도 없이 시작되었다는군. 개화에 필요한 일조량이 부족해서 아직 꽃이 피지 않았으니 별 수 없는 거지. 이 세상에 나와 70번째로 맞이하는 봄이라 친구들과 소풍갈 계획이 많은데 궂은 날씨 때문에 어긋나지는 않을지 걱정도 돼. 오늘은 산업화와 기후위기의 심화로 다시는 보기 힘든 어렸을 적 고향의 봄을 회상해보는 시간을 갖고 싶네.

논과 밭이 많은 넓은 평야였던 내 고향의 봄은 푸른 잎을 내민 보리를 밟는 집안 행사로 시작했네. 추운 겨울에 얼었던 보리밭이 봄바람에 녹을 때 보리의 싹이 뜨지 않고 땅에 뿌리를 잘 내릴 수 있도록 돕고, 너무 따뜻하여 보리의 잎이 웃자라는 것을 막기 위해서 온 식구들이 함께해야만 했던 보리밟기야. 이른 봄이면 동네 누나들 따라 다니면서 영산강 제방과 논두렁에서 냉이, 달래, 민들레, 고들빼기, 쑥 등 봄나물을 캤고, 동네 앞 냇가에서 물이 오르기 시작한 버들가지를 꺾어 버들피리를 만들어 불며 골목을 쏘다니던 기억도 아직 생생하게 남아 있어.

4월이면 내 고향 영산강에서 물을 차고 오르던 은어(銀魚) 떼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해. 먼저 고재종 시인의 <날랜 사랑>를 읽어 보게나.

“얼음 풀린 냇가/ 세찬 여울물 차고 오르는/ 은피라미떼 보아라/ 산란기 맞아/ 얼마나 좋으면/ 혼인색으로 몸단장까지 하고서/ 좀더 맑고 푸른 상류로/ 발딱발딱 배 뒤집어 차고 오르는/ 저 날씬한 은백의 유탄에/ 봄햇발 튀는구나// 오호, 흐린 세월의 늪 헤쳐/ 깨끗한 사랑 하나 닦아 세울/ 날랜 여인아 연인들아”

어렸을 적 보았던 은어 떼가 생각날 때마다 떠올리는 시야. 은어는 물이 맑은 하천, 특히 밑바닥에 자갈이 깔려 있는 곳을 좋아하지. 그들의 주된 먹이가 돌에 붙은 조류이기 때문이야. 은어는 오염되지 않은 일급수에서만 사는 바다빙어과의 민물고기이네. 어릴 때 바다로 나갔다가 4월쯤이면 다시 강으로 돌아오지. 봄 햇살이 눈부시게 수면 위에 내리쬐던 날에 발딱발딱 물을 차고 오르던 모습이 정말 장관이었어. 요즘 사람들이 놀이공원에서 돈을 주고 관람하는 돌고래 쇼보다 훨씬 더 멋진 자연 풍경을 직접 보면서 컸으니 운이 좋았던 거지.

위 시에 나오는 피라미와 은어는 다른 물고기야. 하지만 산란기가 되면 수컷들이 혼인색으로 화려하게 단장하는 것은 피라미와 은어 둘 다 같아. 눈을 살며시 감고 ‘혼인색으로 몸단장’을 한 은어 떼들이 물을 차고 오를 때마다 잔잔한 물결 위로 튀는 봄 햇살을 상상해 보게나. 숨이 막힐 것 같은 환상적인 강 풍경이 떠오르지 않은가? 젊은이라면 ‘혼인색으로 몸단장’하고 ‘발딱발딱 배 뒤집어 차고 오르는’시간을 자주 가져야 하는데… 신자유주의가 부추기는 경쟁 때문에 연애도 제대로 못하고 살아야 하는 요즘 젊은이들 보면 안타까워. 이런 세상을 만들어놓은 어른의 한 사람으로서 그들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내 기억 속에 아직도 또렷하게 남아있는 또 다른 봄날 기억은 늦은 봄에 넓은 벌판 저 멀리서 나를 부르던 아지랑이의 아른거림과 누렇게 익은 보리밭 위를 자유롭게 비상하던 종달새들의 노래 소리야. 이것들 또한 지금은 고향에 가도 볼 수 없는 풍경들이지. 그래서 봄날이면 영국의 작곡가인 윌리엄스(Ralph Vaughan Williams, 1872~1958)가 시인 조지 메레디스(George Meredith)의 <종달새는 날아오르고 The Lark Ascending>에 곡을 붙인 <종달새의 비상>이나 하이든의 현악사중주 63번 D장조 ‘종달새’의 1악장을 들으면서 넓은 보리밭 위에서 짝을 지어 노래하고 춤추던 종달새들을 떠올리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어서 얼마나 서운한지 몰라.

1960년대 이후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해서 다시는 볼 수 없는 머나먼 추억으로만 남은 것들이 많네. 개구쟁이들의 발걸음 소리에 놀란 개구리들이 펄쩍펄쩍 뜀박질하던 영산강 둑길, 긴 잠에서 깬 누런 뱀이 긴 혀를 널름거리며 가로지르던 신작로, 허리에 책보를 매고 까까머리 동무들과 함께 걷고 뛰었던 보리밭 샛길, 모두 기억마저 희미한 추억의 길이 되어버렸어. 지금은 고향에 가도 보리를 심고 거두는 농부도 없고, 봄 하늘에서 넘놀던 종달새도 멀리멀리 떠나버렸고, 신작로는 아스팔트로 포장되었고, 넓은 논과 밭에는 온통 비닐하우스뿐이야. 그러니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어릴 적 봄날이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처럼 더 그리울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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