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관석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지난 4일 <시사위크>와 인터뷰에서 지역구인 인천 남동구을의 지역 발전과 힘없는 서민들을 위한 노력을 다짐했다.

[시사위크=소미연 기자] 윤관석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의 학창시절 꿈은 기자였다. 신문방송학과에 진학한 것도 꿈을 이루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부푼 가슴을 안고 교내 학보사 문을 두드렸으나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1학년 새내기들에겐 자격이 없었던 것. 1년 뒤 다시 오라는 야속한 말만 듣고 돌아선 20살 윤관석의 눈에 뛴 것은 방송국이었다.

“그때만 해도 ‘기자’라고 하면 학보사를 먼저 떠올렸기 때문에 방송국은 생각도 못했어요. 그런데 인문관 복도에 나오면서 방송국을 처음 보게 됐는데, 방송국에도 기자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나중에 학보사로 옮겨도 된다는 확답을 받고 방송국 시험을 봐서 들어갔는데, 결국 학보사를 못가고 눌러앉았어요. 학보사에 가고 싶다고 말하니까, 3학년 선배가 옥상으로 부르더니 막 때리는 거예요. 우리와 라이벌인데 거길 가려 하냐면서…”

▲ 윤관석 의원은 암울한 대학시절을 보냈다. 입학한 1979년엔 10·26사태가 발생했고, 이듬해 5·18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그는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 사진제공=윤관석 의원
선배의 만류로 학보사를 갈 순 없었지만, 관심은 여전했다. 학생운동을 시작하게 된 것도 학보사에 투고한 원고가 발단이 됐다. 당시 윤관석 의원의 글을 읽은 경제학과 선배가 느닷없이 찾아와 함께 공부해 볼 것을 권유했다. 사회과학에 대한 지적 호기심으로 시작한 공부가 이른바 ‘이념써클’의 ‘시각교정’이란 것은 뒤늦게 깨달았다. 기자의 꿈을 접게 된 결정적 배경이다. 대학에 입학한 1979년 10·26사태가 발생했고, 이듬해 5·18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진 암울한 시대가 윤관석 의원을 학생운동으로 이끌었다.

“공부하면서 굉장한 충격을 받았어요. 그동안 제가 알고 있었던 역사와 반대였으니까요. 더욱이 젊고 지적 호기심도 많았을 때니까 정의감과 역사의식이 범벅이 된 것 같아요. 그땐 민주화 투쟁이 존재의 이유라고 생각했거든요. 결국 3학년 때 남영동 치안본부에 잡혀가서 한 달 넘게 고문을 받았어요. 돌아갈 수 없는 길을 건너고 말았죠.”

학생운동 전력으로 정상적인 취업을 꿈꿀 수 없었던 윤관석 의원은 대학 졸업 후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26세 청년 윤관석이 찾은 곳은 다름 아닌 주안공단이었다. 용접공으로 인천 생활을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 한 번도 인천을 벗어난 적이 없다. 주안공단에 청춘을 묻었고, 인천에 뿌리를 내렸다. 시민운동의 근거지도 인천이었다. 1997년 문민정부의 노동법 개악 철회를 위한 ‘민주개혁을 위한 인천시민연대’의 사무처장을 지냈고, IMF사태 이후 실업 문제 극복을 위한 민간 대책기구 ‘실업극복국민운동 인천본부’ 사무처장을 맡았다.

▲ 대학 졸업 후 노동운동에 투신한 윤관석 의원은 주안공단에 청춘을 묻었고, 인천에 뿌리를 내렸다. 시민운동의 근거지와 정치의 출발점도 인천이었다. 그가 지역구 이름을 딴 ‘남동을 지킴이’, ‘남동박사’로 불리는 이유다. / 사진제공=윤관석 의원
윤관석 의원을 정치로 이끈 것은 2002년 대선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선거운동을 돕기 위한 ‘국민참여운동 인천본부’에 참여한 그는 이듬해 시민들의 실질적인 정치 참여를 위한 ‘인천 시민네트’를 조직해 목소리를 키웠다. 그 과정에서 소위 ‘오세훈법’으로 불린 정당개혁법이 통과되자 정치를 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정치권에 개혁의 바람이 불고 있는 만큼 그 틀을 잡는데 일조하고 싶다”는 생각이 컸다. 그래서 첫 발을 내딛은 것이 2004년 열린우리당의 입당이었다.

인천시당 사무처장으로 본격적인 정치 행보에 나선 윤관석 의원은 제5기 인천광역시청 초대 대변인으로 활동한 뒤 19대 총선에서 인천 남동구을에 당선돼 여의도 입성을 이뤘다. 당시를 회상한 윤관석 의원은 “출마의 뜻은 없었다”고 털어놨다. 다만 “직접 부딪혀보니 선출직이 아니고선 할 수 있는 역할에 한계를 느꼈다”는 게 윤관석 의원의 고백이다. 이후 지난 4일 <시사위크>와의 인터뷰에서 그가 남긴 메시지.

“학생운동, 민주화운동, 노동운동, 시민운동을 거쳐 국회의원에 당선되기까지 다양한 경험을 겪었어요. 그 과정에서 정치가 제 역할을 다 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곤 마음이 아팠습니다. 힘들고 어렵고 서럽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희망을 갖게 만드는 것이 정치 아닌가요. 제가 시민사회에서도, 당에서도 대변인을 많이 했는데 이들을 위한 대변인이 되고 싶어요. 중산층과 서민, 을의 대변인이 되겠다는 초심을 잃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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