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남역 8번 출구 앞 반올림 천막 농성장. <사진=시사위크>
[시사위크=권정두 기자] 여전히 쌀쌀한 공기가 남아있던 지난 22일. 서울 한복판인 강남역 일대는 여느 월요일 오후와 다를 바 없이 분주했다. 저마다의 행선지를 향해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는 자동차와 사람들의 모습은 다소 흐린 날씨 탓인지 유난히 삭막하게 느껴졌다.

그런 가운데서도 강남역 8번 출구 앞엔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것이 있었다. 강남역 일대 수많은 빌딩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삼성그룹 사옥을 배경 삼아 초라하게 자리 잡은 작은 천막이 그것이다.

천막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노숙농성 139일차’라는 글씨였다. 그리곤 ‘삼성 직업병 문제 올바른 해결 촉구’, ‘우리는 진정성 있는 사과를 원한다’ 등의 호소가 적힌 글귀도 눈에 들어왔다. 그렇다, 이곳은 삼성반도체공장 직업병 피해자들 반올림의 노숙농성 현장이다. 반올림은 지난해 10월부터 해가 바뀐 지금까지 이곳에서 노숙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 고(故) 황유미 씨의 아버지 황상기 씨. <사진=시사위크>
◇ “반도체 공장 직업병 문제 해결? 여전히 제자리”

출퇴근 시간도, 점심시간도 아닌 탓에 오가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적잖은 사람들이 농성 천막에 관심을 보였다. 한 중년 남성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동안 천막 주변에 적힌 내용을 꼼꼼히 살피더니, 모습을 나타낸 지인에게 설명을 하며 자리를 뜨기도 했다. 또한 젊은 학생부터 머리가 희끗한 노인, 심지어 외국인까지 많은 이들이 천막 앞에서 발길과 눈길을 멈췄다.

한동안 농성장 주변을 바라보던 기자는 꽁꽁 싸맨 천막 출입문으로 몸을 숙이고 들어갔다. 너무나도 좁고 열악한 그곳엔 익숙한 얼굴이 반가운 표정으로 기자를 맞았다. 삼성전자 반도체공장 직업병 문제를 처음 제기해 지금까지 싸움을 이어오고 있는 고(故) 황유미 씨의 아버지 황상기 씨였다.

황상기 씨는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저 삼성이 바뀔 수 있겠느냐”라며 말문을 열었다. 3대 핵심 의제 중 재발방지에 대해선 간신히 합의가 이뤄졌지만, 보상과 사과 문제에 대해선 한 치도 진전된 것이 없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삼성 반도체공장 직업병 문제가 해결되거나, 해결 국면에 접어든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 언론을 통해 알려진 보상 방안은 삼성 측이 발표한 것일 뿐, 어떤 합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또한 ‘타결’이 됐다며 대대적으로 보도된 것은 재발방지 방안에 국한된다.

특히 반올림이란 이름으로 함께 활동했던 일부 유가족 및 피해자들이 ‘가족대책위원회’를 구성해 별도의 노선을 걷기 시작하면서 사태는 더욱 복잡해졌다. 황상기 씨는 “반올림과 가대위로 나눠진 뒤 삼성의 태도가 더욱 나빠졌다”며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 반올림 천막 농성장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한 시민. <사진=시사위크>
그러나 천막 농성을 향한 시민들의 관심에 대해 이야기 할 땐 다시금 표정이 밝아졌다. 황상기 씨는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보인다”며 “힘내라고 응원을 해주는 것은 물론, 성금을 주는 경우도 있다. 내용을 알고 난 뒤 삼성 건물을 보며 비판이나 욕을 하는 이들도 있고, 특히 외국인들은 많이 놀라곤 한다”고 설명했다.

때문에 반올림은 춥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천막 농성을 이어갈 계획이다. 황상기 씨는 “아마도 삼성이 지닌 여러 문제 중에 이 작은 천막을 가장 성가시게 생각하지 않을까 싶다”며 “진정한 사과와 보상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삼성이 변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본 삼성은 결코 스스로 변할 수 없다. 시민사회든, 정치권이든 외부에서 바꾸는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 반올림 천막 농성장. <사진=시사위크>
얼마 후면 3월이다. 3월이면 어김없이 고 황유미 씨의 기일도 돌아온다. 반올림은 올해 역시 3월 첫째 주를 추모주간으로 정하고, 각종 행사를 마련할 계획이다.

황상기 씨는 “유미가 떠나고 싸움을 시작한 처음을 생각하면, 그래도 많은 것이 바뀌었다”며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를 알고 있고, 법적으로 산재 인정을 받는 등의 성과도 있었다. 하지만 정작 삼성만큼은 달라진 것이 없다. 더 많은 시민들이 관심을 가져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황상기 씨와 대화를 마치고 천막 밖으로 나오자 다시금 서울의 삭막한 공기가 주위를 둘러쌌다. 특히 화려하고 웅장한 삼성그룹 건물과 초라하기 짝이 없는 반올림의 천막은 너무나도 극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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