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호남홀대론’에 대해 적극 해명하며 “앞으로 광주와 호남의 아픔을 알아가는 데 더 노력하겠다. 다시는 실망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문재인 전 대표 측 제공>
[시사위크|광주=소미연 기자]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달라졌다. 광주시민들 앞에 선 그는 “정권교체로 열어나갈 새 시대의 첫차가 되겠다”고 힘주어 말하는가 하면 30대 중반에 반백의 머리가 된 사연과 참여정부 첫해 민정수석을 지내다 이가 10개 빠진 사연 등을 소개하며 인간미 넘치는 특유의 매력을 드러냈다. 신호위반 여부를 묻는 질문에 “바쁠 때 남 안보면”이라고 솔직한 대답을 내놨고, 영어로 자기소개를 부탁하자 “불가능하다”고 마이크를 넘기기도 했다. 광주시민들의 웃음은 끊이질 않았다. 스스로를 ‘재미없는 사람’이라 불렀던 문재인 전 대표는 “좀 뻔뻔해졌다”고 설명했다. 그만큼 “절박해졌다”는 얘기다.

◇ 호남 문제 해결 못한 지적 겸허히 수용하지만… “홀대 아냐”

실제 문재인 전 대표는 대선을 치르게 될 2017년을 호남의 염원, 촛불시민들의 갈망인 “정권교체를 반드시 이뤄내야 할 절체절명의 해”라고 생각했다. 뿐만 아니다. “적폐 청산과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 수 있는 두 번 다시없을 절호의 기회”라고 믿었다. 그가 새해 첫날 광주 무등산을 오른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무등산에서 솟아오르는 해를 보며 ‘새 시대의 첫차’를 다짐한 것. 관건은 호남의 지지다. 야권을 대표하는 대선후보에게 호남 민심은 승리의 필수조건이다. 때문에 문재인 전 대표는 22일 광주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열린 ‘포럼광주’ 출범식에서 적극적인 구애를 펼쳤다.

시작은 참회였다. 광주와 호남에서 “전폭적인 지원으로 참여정부를 만들어 줬지만 호남의 아픔, 호남의 소리, 호남의 삶을 모두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 “그런데도 지난 대선 때 또 기적 같은 지지를 모아줬으나, 그 기대에 부흥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고개가 숙여졌다. 문재인 전 대표는 “너무나 면목이 없어서 죄송하다는 인사도 제대로 드리지 못했다. 호남을 서운하게 했다”면서 “염치가 없는 사람이지만, 정권교체라는 대의 앞에서 미워도 다시 한 번 손을 잡아주실 것을 호소드린다”고 말했다.

▲ 문재인 전 대표가 22일 광주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열린 ‘포럼광주’ 출범식에 참석해 지지를 호소했다. 이날 출범식엔 주최 측 추산 1만여 명의 지지자가 참석해 문재인 전 대표의 대선 출정식을 방불케 했다. <문재인 전 대표 측 제공>
물론 호남의 비판은 달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의도적으로 호남을 홀대했다는 지적에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고 주장했다. “오히려 장·차관의 호남 비율이 역대 어느 정부보다 높았다”는 것. “단순히 숫자만 많은 게 아니라, 법무부 장관, 검찰총장, 국세청장, 국정원장, 국방장관, 기획예산처 장관 등 힘 있는 부처 장관들이 호남에서 많이” 선출됐다는 게 문재인 전 대표의 설명이다. 그는 “국가 의전서열 1위인 대통령부터 10위권 가운데 대여섯 명은 항상 호남이었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문재인 전 대표에 따르면, 참여정부 시절 5부(대통령, 국회의장, 대법원장, 헌재소장, 국무총리)요인에 호남 배려가 많았다. 집권 당시 교체된 국회의장 2명과 임명장을 받은 대법원장 1명이 모두 호남 출신이었다. 국무총리로 임명된 4명 가운데 2명도 호남이었다. 영남 출신인 노무현 전 대통령이 “호남을 가장 중요한 파트너로 생각하고 중요한 자리들을 전부 호남에 할애하면서 탕평을 도모했다”는 얘기다. 따라서 그는 “호남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점은 겸허하게 받아들이지만 홀대만큼은 정말 아니다”고 재차 강조했다.

◇ 민주화운동 이후 광주와 늘 함께하는 삶 “손 놓지 않을 것”

이날 문재인 전 대표는 호남홀대론에 대한 해명에 많은 시간을 쏟았다. “앞서가는 후보이기 때문에 공격받는 것”이라 생각하며 말을 아꼈던 그도 호남홀대 비판은 가슴이 아팠던 것이다. 20대 청년시절 민주화운동에 뛰어든 이후 “광주와 함께 살아왔다”고 생각한 만큼 “광주가 알아주겠거니 조금 안일하게 생각했던” 게 실수였다. 때문일까. 문재인 전 대표는 호남과의 연관성을 강조했다. 그는 1980년 5월 경희대 총학생 대표로 ‘서울역 회군’에 참여한 사실을 밝힌 뒤 “그때 대학생들이 철수하면서 광주가 외롭게 군부와 맞닥뜨리게 됐다. 그 책임이 크다고 생각해 부채의식을 가지고 살았다”고 털어놨다.

문재인 전 대표는 5·18민주화운동이 벌어지기 전날 구속됐다. 이후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던 1987년엔 6월 항쟁의 중심에 있었다. 그는 “당시 부산 가톨릭센터에서 노무현 변호사와 광주 비디오 관람전을 공개적으로 하고, 수만 명의 부산 시민들이 그 비디오를 봤다. 그것이 6월 항쟁의 동력으로 이어졌다”면서 “6월 항쟁 때 부산이 중심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박종철 열사가 부산 출신이었다는 것에 더해서 광주를 알리려는 노력들, 광주에 대한 민주시민들의 부채의식이 작용했다”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문재인 전 대표는 전남 나주시 남평읍을 본관으로 하는 ‘남평 문씨’와 해남 대흥사에서 고시공부를 한 사연을 소개했다. “두륜산의 정기로 사법시험에 합격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특히 문재인 전 대표는 “당시 해남에서 공부만 한 게 아니라 주민등록까지 옮겨 법적으로도 해남군 삼산면 주민이기도 했다”면서 “이 정도면 저도 호남 사람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이에 광주시민들은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그는 “앞으로 광주와 호남의 아픔을 알아가는 데 더 노력하겠다”면서 “다시는 실망시키지 않겠다. 손을 놓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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