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시사위크] 문재인 대통령이 후보 시절에 발표한 ‘5대 인사원칙’이 뭔지는 알지? 논문표절, 위장전입, 세금탈루, 부동산투기, 병역면탈 등에 문제가 있는 인사는 공직에 임명하지 않겠다는 다짐이었지. 하지만 새로운 정부가 출범하면서 내정된 장관이나 고위직 공무원들 중 이 5대 인사원칙 항목 가운데 하나라도 위배하지 않은 사람이 몇 사람이나 있었는가? 비정상적인 관행과 적폐를 청산하겠다는 정부의 고위공직자들도 이른바 보수정권의 권력자들과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니 몹시 씁쓸하더군. 왜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모든 사람들의 삶이 비슷할까?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다르면 살아가는 방식도 달라야 정상 아닌가? 왜 자신을 진보적인 사람이라고 규정하는 사람도 돈과 권력이 삶의 주요 목적이 되어야 할까? 답답한 마음에 오규원 시인의 <둑과 나>를 골랐네. 함께 읽어보세.                       

“길은 바닥에 달라붙어야 몸이 열립니다/ 나는 바닥에서 몸을 세워야 앞이 열립니다/ 강둑의 길도 둑의 바닥에 달라붙어 들찔레 밑을 지나/ 메꽃을 등에 붙이고 엉겅퀴 옆을 돌아 몸 하나를 열고 있습니다/ 땅에 아예 뿌리를 박고 서 있는 미루나무는 단단합니다/ 뿌리가 없는 나는 몸을 미루나무에 기대고/ 뿌리가 없어 위험하고 비틀거리는 길을 열고 있습니다/ 엉겅퀴로 가서 엉겅퀴로 서 있다가 흔들리다가/ 기어야 길이 열리는 메꽃 곁에 누워 기지 않고 메꽃에서/ 깨꽃으로 가는 나비가 되어 허덕허덕 허공을 덮칩니다/ 허공에는 가로수는 없지만 길은 많습니다 그 길 하나를 혼자 따라가다/ 나는 새의 그림자에 밀려 산등성이에 가서 떨어집니다/ 산등성이 한쪽에 평지가 다 된 봉분까지 찾아온 망초 곁에 퍼질러 앉아/ 여기까지 온 길을 망초에게 묻습니다/ 그렇게 묻는 나와 망초 사이로 메뚜기가 뛰고/ 어느새 둑의 나는 미루나무의 그늘이 되어 어둑어둑합니다”

꽤 어려운 시지? 하지만 들찔레, 메꽃, 엉겅퀴, 깨꽃, 망초, 미루나무 등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식물들과 나비, 새, 메뚜기 등 하늘을 나는 동물들이 시의 화자인 ‘나’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생각하면서 읽으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좋은 시일세. 이 시에 등장하는 동물과 식물들은 우리가 중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배운 ‘객관적 상관물’이지. 시인의 정서를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형상화시키는 사물들 말일세.

이 시는 노시인이 해가 질 무렵에 강둑의 길에서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서 죽음을 생각하는 서정시이네. 화자인 ‘뿌리가 없는 나’는 ‘땅에 아예 뿌리를 박고 서 있는 미루나무’에 기대서 자신이 살아온 ‘위험하고 비틀거리는 길’을 되돌아보고 있네. 엉겅퀴에서 메꽃을 거쳐 깨꽃으로 가는 여정이 의미심장하지. 이 시에 나오는 식물들의 특성을 알면 시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걸세. 엉겅퀴는 잎에 가시가 많은 곧게 서 있는 식물이고, 메꽃은 다른 물체를 감고 오르거나 땅을 기는 식물이며, 깨꽃은 고소한 향을 가진 참기름을 만드는 식물인 참깨의 꽃이야.

나는 보통 사람들이 삶을 대하는 자세가 이 시의 화자인 ‘나’가 옮겨 다닌 꽃들 순으로 바뀐다고 생각하네. 젊었을 땐 세상 무서운 줄 모르지. 그래서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으로 남에게 아픔을 주는 가시 돋친 말과 행동도 많이 하지. 하지만 나이가 들어 부모로부터 독립하게 되면 좋든 싫든 먹고 사는 일에 전념할 수밖에 없네. 스스로의 삶을 책임진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인가? 살다보면 본의 아니게 남에게 상처를 주거나 비굴하게 굴어야 할 때도 많아지지. 그게 싫어서 나비가 되어 깨꽃으로 가려고 애쓰다가 절망하는 사람들도 많고.

하지만 세상만사가 내 뜻대로만 되는 건 별로 없어. 하늘에는 ‘뿌리가 없는’ 사람들이 기댈 미루나무 같은 가로수는 없지만 길은 많지. 이런 경우 많은 게 좋은 건 아니야. 그 많은 길들을 다 가 볼 수 없는 게 우리들 삶의 한계이니까. 선택은 자유를 주지만 동시에 책임도 따르는 고약한 선물인 건 알지? 이 시의 ‘나’도 많은 길들 가운데 하나를 골라서 혼자 가다가 그만 ‘새의 그림자’에 밀려 오래된 무덤이 있는 산등성이에 떨어지고 마네. 그래서 ‘평지가 다 된 봉분’ 옆에 있는 ‘망초 곁에 퍼질러 앉아’ 그 망초에게 묻지.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지?’ 망초가 뭐라 대답했을까? 아마 이렇게 대답했을 거야. “그걸 왜 나에게 물어? 네가 더 잘 알면서.”

여기서 ‘새’는 고착화된 사회적 계층과 계급제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네. 깨꽃을 찾아 힘에 부쳐 ‘허덕허덕’ 날던 나비는 ‘새’도 아닌 ‘새의 그림자’에 밀려 나가떨어지네. 민주화된 사회에 계급 계층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교과서적인 말을 믿고 상승이동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자주 겪는 좌절이 그런 거야. 또 갑자기 돈만 많아진 졸부들이 지배계급의 일원이 되려고 할 때 흔히 당하는 사회적 배제의 경험도 그런 거고.

그러니 깨꽃으로 가는 나비가 되어 훨훨 난다는 건 많은 사람들에겐 ‘꿈’일 수밖에 없어. 아마 그런 꿈에서 일찍 깨어나는 게 그리 길지 않은 한 생을 행복하게 살다 가는 한 방법일 거야. 부귀영화 같은 건 더러워서 버린다는 기개가 있어야 하루하루를 즐겁게 살 수 있어. 그렇지 못하면 ‘어둑어둑’해지는 저녁에 ‘망초 곁에 퍼질러 앉아’ 자신의 삶을 씁쓸하게 되돌아볼 수밖에 없고. 나이 들어 아무 데나 ‘퍼질러 않는’ 노인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깨’만 찾는 꿈에서 빨리 ‘깰’수록 좋아. 자기 자신을 ‘깨’우치는 노력을 하면서 분수에 맞게 사는 게 가장 행복한 삶이라는 걸 잊지 말게나.

마지막으로 《맹자》〈고자상편〉10장에 나오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네. 맹자 말씀일세. ‘아무리 생사에 중요한 음식이라도 꾸짖거나 발로 밀어서 주면, 길을 가는 사람이나 거지도 받지 않는다. 하지만 녹봉이 많은 높은 벼슬을 주면 예의를 차리지 않고 기어이 받으려고 한다. 왜일까? 인간의 본성 중 하나인 수치심을 잃었기 때문이다.’ 공적인 자리에서 일하기에는 많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이 목숨이 달린 것도 아닌 벼슬에 기를 쓰고 달려드는 꼴들을 보게나. 염치가 사라진 세상임이 분명하네.

저작권자 © 시사위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