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0년 기자회견을 갖고 고개를 숙였던 키코 피해기업 공대위 회원과 플래카드. <뉴시스>

[시사위크=현우진 기자]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듯했던 키코(KIKO) 사건이 최근 다시 입방아에 오르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박범계·박용진 의원이 재조사를 촉구했을 뿐 아니라 이낙연 국무총리도 지난 9월 대정부질의를 통해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정권이 바뀌면서 정계뿐 아니라 금융계에도 새 바람이 불길 기대하는 목소리가 높아졌음을 방증하는 현상이다.

◇ 수사보고서 공개를 허하지 못한 이유

지난 2013년 9월, 대법원은 키코 피해기업이 제기한 소송에 대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은행은 키코 상품의 구조 및 그로 인해 발생하는 마이너스 시장가치에 대해 고지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할 수 없다”며 기각 판결을 내렸다. 수수료가 시장관행에 비해 현저히 높지 않다면 그 액수는 거래위험성을 평가하는 중요 요소가 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더불어민주당 박범계 의원이 국정감사에서 밝힌 자료는 판결 내용이 달라질 수 있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대법원이 키코 판결의 내용을 뒤집을 수 있는 증거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도 이를 묵살했다는 것이다.

키코 사건을 담당했던 서울중앙지검 박성재 검사의 수사보고서가 핵심이었다. 한국기업회생지원협회의 자료에 따르면 당시 공동대책위원회가 서울중앙지검에 제기한 수사보고서 공개요청은 개인사생활 침해를 이유로 거부됐으며, 뒤이어 진행된 정보공개 소송은 대법원까지 이어졌다. 대법원이 보고서 공개를 최종결정한 것은 키코 판결보다 5개월 늦은 시점이었다.

14년 3월 공개된 수사보고서에는 키코 상품을 판매한 SC제일은행의 딜러와 심사역의 대화를 담은 녹취록이 기록돼있었다. “선물환은 남는 것이 전혀 없다”거나 키코 계약을 두고 “마진 이빠이(충분히)해서…” 등의 발언이 나왔다. 당시 보고서 작성자는 “은행은 선물환으로 인한 마진보다 키코가 훨씬 더 많이 이익이 남는다고 판단하고 전략적으로 키코를 판매한 흔적이 엿보인다”는 평가까지 남겼다. 박범계 의원실이 “녹취록이 공개됐다면 대법원 결론을 뒤집을 수 있는 핵심 증거가 될 수 있었다”며 안타까움을 드러낸 이유다.

◇ 적폐청산 논의, 금융계에서도 불붙을까

키코 사건을 ‘금융 적폐’로 규정하는 단체들은 사건 자체뿐 아니라 관계자들 또한 재조사 대상이 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피해자인 중소기업들과 거대은행이 동등한 입장에서 조사‧재판받지 못했다는 의혹이 짙기 때문이다.

관리감독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아온 금융감독원이 대표적이다. 금융감독원은 내부 세칙을 통해 파생상품 거래 시 내재된 리스크 및 중요정보를 상대에게 고지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었지만, 조붕구 한국기업회생지원협회장은 “은행이 (상세한 상품구조를)설명하지 않았다는 것을 금융감독원이 알고 있으면서도 사건을 덮었다”며 금감원이 기업의 손실을 전혀 보호해주지 못했다고 밝혔다.

수사에 비협조적이었던 검찰도 도마 위에 올랐다. 키코 재수사 촉구운동에 동참하고 있는 금융정의연대는 27일 “지난 수사과정에서 녹취록을 덮은 점, 수사 검사의 석연치 않은 발령 등 판매은행들에 대한 ‘봐주기 의혹’에 대해서도 수사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2012년 당시 서울중앙지검(당시 한상대 서울지검장)이 수사보고서 공개를 거부했으며, 보고서를 작성한 사건 담당검사가 전보 조치됐던 것을 두고 나온 이야기다.

조붕구 한국기업회생지원협회장은 키코 사건을 “금융적폐를 날릴 수 있는 스모킹 건이다”고 표현했다. 태블릿PC가 최순실·박근혜를 재판장에 세운 ‘정계의 스모킹 건’이었듯 키코 사건을 통해 금융계를 둘러싼 해묵은 비리관행들을 파헤칠 수 있다는 뜻이다. “검찰과 법원, 거대 은행과 로펌이 합작해 사회적 약자인 중소기업들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박범계 의원의 발언 또한 같은 맥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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