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시사위크] 벌써 2주가 번쩍 지났네. 카메라랑 놀다 보면 시간이 얼마나 잘 가는지… 카메라가 미울 정도여. 지난 일요일에는 사진 공부하면서 만난 젊은 친구들과 안성에 다녀왔어. 사진 공부하다 보면 어울리는 친구들도 많아지고, 함께 다니는 곳도 많아지지. 그래서 좋아. 내가 사진을 계속하는 네 번째 이유는 젊은 친구들이 많아지기 때문이야. 나이 들어 또래만 어울리면 자신도 모르게 이른바 ‘꼰대’가 되어버리기 쉽지. 그러면 젊은이들과 이른바 세대 차이를 실감할 수밖에 없어. 난 그렇게 살고 쉽지 않네. 남은 세월 나보다 더 젊은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몸과 마음 다 젊게 살다가 돌아가고 싶어.

앞에서 사진은 발로 찍는다는 말을 했지? 나는 예순이 넘어 사진 공부를 시작했기 때문에 젊은 사람들보다 더 열심히 찍어야 해. 그래야 그들과 어울릴 수 있거든. 그러니 날마다 쉬지 않고 찍을 수밖에 없어. 사진 찍는 행위가 일상의 한 부분이 된 이유야. 지난 3년 동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날마다 사진기랑 놀았지. 그러다보니 나이 든 사람들이 어려워하는 기술도 많이 습득했어. 게다가 날마다 찍어야 하니 평상시에 생각지도 못했던 아이디어들도 떠오르는 경우도 있어. 사진을 찍는 게 육체적인 건강만 좋게 해주는 게 아니야. 쉬지 않고 사진 공부를 하다 보니 두뇌 훈련도 활발해지는 것 같아서 좋아. 일석이조라고나 할까. 이게 내가 사진에 흠뻑 빠져 사는 다섯 번째 이유야.

내가 언젠가 매일 시를 한 편씩 읽는다고 말한 적 있지? 내가 시를 읽는 목적은 크게 두 가지야. 하나는 시를 통해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고, 또 하나는 시를 읽고 뭔가를 깨우치기 위해서야. 그런데 시에서 즐거움과 깨달음을 함께 얻기 위해서는 먼저 시어들이 갖고 있는 문자적 의미를 제대로 이해해야 하네. 하지만 거기에서 멈추면 즐거울지는 모르지만 깨달음에는 이를 수 없어. 문자적 의미를 이해했으면 그 시를 통해 자기 자신과 자신이 살아온 삶, 더 나아가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와 세계를 함께 돌아볼 줄 알아야 하지. 그러면서 자기 자신과 세계를 변화시켜 나갈 수 있는 힘을 얻어야 하고. 이런 식으로 시나 글을 읽는 걸 환기적 독법(evocative reading)이라고 하네. 내가 시를 자주 읽는 건 결국 나의 내면에 무언가를 일깨워서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서야. 난 사진도, 특히 내가 자주 찍는 셀프 포트레이트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네. 뷰 파인더를 통해 바라보는 대상들을 통해 나와 내 주위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지. 내가 사는 세계와 내 자신을 바라보면서 나를 채찍질하고 깨우칠 시간을 가져. 그러면서 나이 들면서 약해지는 사회의식을 유지하고 강화한다고나 할까. 이게 여섯 번째 이유야.

내가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일곱 번째 이유는 세상과 나 자신이 변하는 모습을 직접 보고 기록하기 위해서야. 무언가를 담기 위해서는 많은 것들을 유심히 보아야 하네. 눈에 보인다고 다 담는 것은 아니야. 그러니 사진을 찍다 보면 호기심과 관찰력이 함께 늘지 않을 수 없어. 나는 나중에 내 자손들이 내가 찍은 풍경사진이나 셀프 포트레이트를 보면서 ‘우리 할아버지 참 재미있는 분이었구나!’라고 감탄하면서 서로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갖길 바라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사진에게 있어서 한 번 지나간 것은 영원히 가버린 것이 되고 만다”고 말했지. 맞는 말일세. 우리는 살아갈 날보다 이미 지나간 날이 훨씬 많은 사람들이야. 얼마 남지 않는 시간 동안, 노인들에게는 점점 더 낯설게 변해가는 세계와 점점 더 많아지는 내 얼굴의 주름들을 마치 하루하루의 일상처럼 카메라에 담고 싶어. 셔터를 누를 힘이 남아 있을 때까지 꼭 지키고 싶은 나 자신과의 약속일세.

내가 사진에 흠뻑 빠져 사는 마지막 이유는 나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서야. 누구나 늙으면 자기가 사는 세상이 불편할 수밖에 없어. 특히 요즘처럼 기술 발달의 속도가 엄청나게 빠른 시대에 노인들이 느끼는 소외감은 점점 커질 수밖에 없지. 그 결과 우울증으로 고생하다 자살하는 노인들도 많고. 세상 변화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소중하게 여기거나 사랑할 가능성도 낮네. 이문재 시인이 <너는 내 운명>이라는 시에서 성인(聖人)은 “우주 전체를 사랑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없앤 사람”이지만, “나는 나를 사랑하는 법을 몰라서 풀 한 포기조차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다.”고 했던 고백은 옳다고 생각해. 먼저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 알아야 타자도 사랑할 수 있어. 그래서 나는 뷰 파인더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기 위해 날마다 사진을 찍네. 물론 나 자신도 그 대상에 포함되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나르키소스 같은 과도한 나르시시즘(자기애)에 빠진 것은 아니니 걱정 말게.

내가 좋아하는 짧은 시를 다시 읊게 되는군.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야.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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