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시사위크] 어제는 오랜만에 햇빛이 좋아 카메라를 어깨에 메고 동네 뒷산에 올라갔네. 얼마 전에 떨어진 낙엽들이 수북이 쌓인, 길이 아닌 길을 일부러 골라서 걸었지. 바스락 바스락…… 낙엽을 밟을 때마다 들려오는 아름다운 노래를 들으면서 가파른 산등선을 오르니 금방 노인들이 모여 운동하는 공터가 나오더군. 그래서 떡갈나무 아래에 있는 벤치에 앉아 땀을 식혔지. 바로 그때 내 눈 앞에서 철 지난 낙엽 하나가 바람결에 맞춰 춤을 추더라고. 반갑다는 인사처럼 보이더군. 땅에 떨어진 그 낙엽을 주워 이런저런 이야기를 서로 나누면서 김사인의 <조용한 일>이라는 시를 생각했네.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철 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볼 길밖에는 없는 내 곁에서/ 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짧지만 아름다운 시일세. 자주 암송하는 시이지만 어제는 꽤 새롭게 다가오더군. 그건 아마 지난 두 달여 동안 내가 사람 관계로 많은 고민을 했기 때문일 거야. 지난 몇 년 동안 믿고 좋아했던 분과 결별을 결심했거든. 회자정리라고 말하지만, 그 이유가 뭐든 마음속에서 한 사람을 떠나보낸다는 것은 많은 고통이 따르는 일일 수밖에 없어. 살며시 내 옆에 내려앉는 낙엽 하나를 바라보면서 저 시를 떠올린 것도 아마 내 마음이 편치 않아서 일거야.

시인은 철 이른 낙엽 하나가 슬며시 곁에 내려와 말없이 그냥 있는 것이 고마운 일이라고 말하고 있네. 물론 시인도 항상 그런 마음은 아닐 거야. 살다 보면 많은 사람들과 어울려 왁자지껄 신나는 시간이 그리울 때도 많거든. 그러면 이 시를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가까운 사람이 뭔가 고민하고 있을 때 쓸데없이 간섭하지 말고 기다려주는 여유를 가지라는 뜻으로 이해하고 싶네. 하지만 그게 가까운 사이일수록 실천하기 어려운 일이기도 하지. 이런 저런 일로 마음이 심란한 사람에게는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지 않고 조용히 옆에 없는 것처럼 있어 주는 게 더 고마운 일일 수도 있는데, 우리 대다수는 그렇게 못하지. 그래서 가까운 사이에 오해도 생기고 헤어지기도 하지.

요즘 다시 친구의 존재 이유를 생각하는 시간이 잦네. 좋은 친구란 어떤 존재일까? 예전에도 한 번 인용했던 《장자》의 <달생편(達生編)>에 나오는 구절이 생각나는군. “발을 잊는 것은 신발이 꼭 맞기 때문이고, 허리를 잊는 것은 허리띠가 꼭 맞기 때문이고, 마음이 시비를 잊는 것은 마음이 꼭 맞기 때문이다.” 구두든 운동화든 하이힐이든 그게 발에 딱 맞으면 신발을 신고 있다는 걸 잊고, 허리에 두루는 띠가 잘 맞으면 허리띠를 매고 있다는 걸 잊고, 누구랑 어떤 문제를 놓고 시시비비를 가릴 논쟁을 하고 싶지 않는 것은 서로 마음이 잘 통하기 때문이라는 뜻이야. 나는 진정한 친구란 이런 사이여야 한다고 생각하네. 옆에 있어도 없는 것 같은 존재. 마치 우리들이 공기 없이는 한 순간도 살 수 없으면서도 그 공기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고 사는 것처럼 친구도 그런 존재여야 한다고 생각해. 좀 어려운 말로 ‘무위(無爲)의 친구’라고나 할까…

물론 그런 관계가 되기 위해 가장 필요한 덕목은 믿음(信)이네. 어떤 사람이 좋은 친구인지 나쁜 친구인지는 그 사람에 대한 신뢰감에 따라 결정될 수밖에 없어. ‘무위(無爲)의 친구’란 이심전심으로 통하는, 눈만 봐도 서로의 마음을 아는 사이이기 때문에 서로 간섭할 필요도 없지. 하지만 어제 했던 말과 오늘 하는 말이 다른 사람과는 가까워져서는 안 되네. 또 자신을 비난하는 소리가 들리면 먼저 그 원인을 찾아 고치려고 노력하는 게 자신의 발전을 위해서도 좋은데, 도리어 상대방 탓만 하는 사람과는 오래 벗해서 좋을 게 없네. 만약 자네 친구가 흔히 보는 싸구려 정치인처럼 자주 말을 바꾸거나 상식에 어긋나는 행동을 죄의식 없이 반복한다면, 지금 바로 단호하게 그만 만나는 게 좋을 걸세. 나쁜 짓은 나도 모르게 시나브로 오염되거든.

한참 동안, 옆에서 조용히, 친구가 되어준 그 낙엽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산을 내려오면서 김용택 시인의 <그날>을 혼자 중얼거렸네. “산이 서서 말한다./ 알았다. 알았으니,/ 그만 돌아가거라./ 나도 누울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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