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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자의 줌인
‘인권’ 사라진 방송 제작현장, 갈 길 멀다
2018. 11. 13 by 이민지 기자 sisaweek@daum.net
열악한 드라마 제작환경을 전했던 배우 허정도 / SBS '미세스캅' 방송화면 캡처
열악한 드라마 제작환경을 전했던 배우 허정도 / SBS '미세스캅' 방송화면 캡처

[시사위크=이민지 기자]

반말, 막말, 비아냥, 육두문자.

모두가 보는 앞에서도, 아이들이 있는 곳에서도.

감독이 배우에게, 스텝에게, 보조출연자에게.

유명배우가 무명배우에게 혹은 스텝에게, 매니저에게.

높은 스텝이 낮은 스텝에게 혹은 무명배우에게 어린 학생에게.

누가 퍼붓고 누가 당하는지는 달랐지만 방향은 항상 같았다.

강자가 약자에게.

오직 기준은 힘일 뿐 때로는 나이도 별 상관이 없었다.

지난 1월 배우 허정도가 자신의 블로그에 작성한 내용 중 일부다. 쉼 없이 달려온 배우 생활 12년 동안 그는 드라마 제작 환경에서 직접 경험한 폭언의 순간들로 마음 깊은 상처를 받았음을 토로했다.

그의 글로 드라마 제작현장의 실태가 적나라하게 전해지자, 2월 이효성 방송통신위원장은 허정도를 비롯해 드라마 제작진들과 함께 간담회를 갖고 제작현장의 문제점 개선을 위한 의견을 수렴한 바 있다. 당시 이 위원장은 “지난해 어렵게 마련한 방송프로그램 외주제작 불공정 관행 개선 종합대책이 시장에 안착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앞서 1월 허정도 블로그에 게시된 글 / 허정도 블로그 캡처
앞서 1월 허정도 블로그에 게시된 글 / 허정도 블로그 캡처

하지만 이로부터 약 10개월의 시간이 흐른 지금, 드라마 제작환경은 크게 달라진 바 없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단역 및 보조출연자들에게 드라마 제작환경은 더욱 차갑기만 하다.

지난 3일 KBS 2TV ‘죽어도 좋아’ 공식 홈페이지 시청자 소감 코너에는 ‘이번에 강릉에서 1박2일 촬영했던 출연자입니다’라는 제목의 게시물이 게재됐다. 

해당 글을 쓴 네티즌은(이하 A씨)는 “때는 1박2일 촬영의 첫 날 첫 신이었다”며 “스텝분들과 배우분들은 먼저 도착해서 준비를 끝난 상태로 기다리고 있었고 저희 출연자들의 버스가 조금 늦게 도착해서 보조출연자들은 급하게 촬영준비를 하게 됐다. 오랫동안 일해 온 출연자들의 일부가 반장님의 성향과 맞지 않아서 이 프로그램을 피한 경우가 많았기에 초보 출연자들이 많은 상태라 어쩔 줄 몰라 하는 출연자들이 많았다”고 당시를 상황을 회상했다.

KBS 2TV '죽어도 좋아' 공식홈페이지 시청자 소감에 게시된 게시물 / KBS 2TV '죽어도 좋아' 공식홈페이지 캡처
KBS 2TV '죽어도 좋아' 공식홈페이지 시청자 소감에 게시된 게시물 / KBS 2TV '죽어도 좋아' 공식홈페이지 캡처

여기서 말하는 ‘반장’은 단역 및 보조 출연자들을 총괄 관리하는 사람을 일컫는 직함이다. A씨는 초보인 배우들을 향해 “야 빨리 움직여 앉아 XX야!” 등의 폭언을 했다고 폭로했다. 현장에 있던 배우와 스태프들이 불편감을 느낄 정도였다고. 이에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반장에게 완곡한 표현을 요청했으나 반장은 계속되는 폭언을 하며 출연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고 설명했다.

더욱이 A씨는 “반장님은 그대로 과격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었고 그 표현에 격분한 김민재(박유덕 역) 배우님께서 ‘조금 더 친절하게 지시를 내릴 수 없을까요?’라고 예의바른 말투로 물었으나, 반장님은 ‘아니 당신과 나는 분야가 다른 데 왜 참견입니까?’라고 반발했다”고 덧붙였다. 

이밖에도 반장은 감독의 허락없이 독단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출연자들을 남겨 추가 촬영을 하는가 하면 감독과 배우들의 말을 무시하다 못해 때리려고 했다고 A씨는 주장했다. 

'죽어도 좋아' 공식 홈페이지 시청자 소감 코너에 올라온 게시물 / KBS 2TV '죽어도 좋아' 공식 홈페이지 캡처
'죽어도 좋아' 공식 홈페이지 시청자 소감 코너에 올라온 게시물 / KBS 2TV '죽어도 좋아' 공식 홈페이지 캡처

이에 대해 ‘죽어도 좋아’ 관계자는 “폭언이 아닌 마찰이라고 들었다”며 “보조출연자와 반장님과의 마찰이라고 들었다. 어디든 마찰은 있다. 마찰이 있는 도중에 김민재 배우님께서 중재를 하셨고 큰 무리 없이 넘어간 사안이다. 현재는 문제없이 잘 촬영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김민재 배우 측 역시 비슷한 취지의 답변을 전했다. 

하지만 반장의 폭언과 고압적 태도가 연이틀 이어졌고, 급기야 현장에 있던 배우가 “저들이 물건이냐”며 보조출연자들에 대한 대우를 문제삼은 점 등을 종합하면 이날의 상황을 제작현장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의견마찰 정도로 치부할 수 있을 지 의문이 남는다.

그런 점에서 최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오른 글들은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지난 10월 ‘보조출연자들 환경 좋게 해주세요’라는 제목의 청원 게시물에는 “저는 지금 보조출연 일을 하고 있다. 현장에서 보조출연 반장들이 ‘야, 너, 새끼’ 등의 욕을 안했으면 좋겠다. 보조출연자들이 뭐라고 하면 부당하게 하고 일도 안준다. 신체폭력, 언어적 폭력 때문에 상처를 많이 받는다”는 내용이 게재되기도 했다.

이뿐 만 아니다. ‘방송 출연료 미지급, 밤샘촬영 등 촬영현장 개선을 위해 문체부는 개선안을 주십시오’라는 제목의 또 다른 게시물에는 “조, 단역 및 보조 출연자들은 잠깐 앉아서 쉴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지 않다. 한겨울에 얼음물에 들어가도 누구하나 챙겨주는 사람이 없다”며 “하지만 군말 없이 일을 한다. 현장에서 그런 것에 불만을 가지는 것에 대해 아니꼽게 보고 그 바닥에서 제외의 대상이 되기 때문. 여기에 임금까지 제대로 못 받고 있는 실정이다. 촬영 스태프들도 마찬가지다”라고 토로했다.

보조출연자들의 환경 개선 관련 청와대 국민 청원 게시물 / 청와대 국민 청원 캡처
보조출연자들의 환경 개선 관련 청와대 국민 청원 게시물 / 청와대 국민 청원 캡처

톱스타가 아닌 단역 및 보조출연자들은 아직까지 인격적인 대우를 받지 못한 채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일하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 13일 전국보조출연자노동조합 측은 <시사위크>와의 통화에서 “(반장은) 최고의 명예다. 반장이 자를 수도 있고, 생살여탈권을 가지고 있다”며 “상당한 힘을 가지고 있다. 찍히면 일을 못나간다. 되도록 잘 보이려고 노력한다. 심한 욕설을 들어도 꾹 참고 일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누구라도 시정되길 바라지만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말도 안되는 소리다. 그러려니 하고 일하고 있다”고 어려움을 호소했다.

대다수 단역 및 보조출연자들이 원하는 것은 ‘정당한 노동자’로서의 대우다. 전국보조출연자노동조합 측은 “갑질 같은 것이 없는 제대로 된 노동자 대우를 받고 싶다”고 말하는 한편 “근본적으로 법 테두리 안에서 해야 할 부분을 노동부, 방송사 등에서 다 손을 놓고 있다. 노동부 매뉴얼에 보면 보조출연자들은 파견법 적용을 받게 돼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적용을 안 받고 방송사는 기획사와 계약하면서 ‘용역계약’이라는 문구로 두루뭉술하게 넘어간다”고 말했다.

이어 “방송사는 기획사와 계약을 할 때 (보조출연자의 임금을) 시간당 9,300원으로 계약한다”라며 “하지만 기획사는 최저임금만을 준다. 나머지는 자기들 이윤으로 챙긴다. 그러나 이마저도 재하청을 주게 되면 이 금액에서 15%를 공제한다. 최저임금 미달이고, 근로기준법 위반이다. 법 테두리 안에서 이뤄지지 않고 묵인하다보니 엉망진창인 상황이다. 경우에 따라 20~30%를 떼이면서도 일을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라고 덧붙였다.

앞서 블로그를 통해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많은 드라마가 만들어지고 있고, 또 많은 사람들이 그 현장으로 첫 발을 디디고 있다. 이제는 제발 그 누구도, 죽지 않고 다치지 않고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함께 노력해서 얻은 열매는 함께 나누었으면 좋겠다”라고 글을 마무리 지은 허정도. 그의 바람처럼 인권선언 등 ‘모두에게 행복한 방송 제작현장’을 위한 움직임이 일고 있지만 현실은 여전히 갈 길이 멀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