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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씨네
[인터뷰] 이정은의 책임감 
2022. 05. 17 by 이영실 기자 swyeong1204@sisaweek.com
영화 ‘오마주’로 관객 앞에 서는 이정은. /준필름
영화 ‘오마주’로 관객 앞에 서는 이정은. /준필름

시사위크=이영실 기자  최근 한국영화계에서 여성 캐릭터가 극의 중심에 서서 활약하는 영화들이 늘어나고 있다. 꼭 여성 중심 서사가 아니더라도, 시대의 흐름에 맞춰 여성 캐릭터를 그려내는 방식이 달라지고 있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배우 이정은은 그러한 변화의 중심에 있다. 여배우들에게 잘 주어지지 않은, 전형적이지 않은 캐릭터를 훌륭히 소화하며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치열한 고민과 자신만의 해석을 더해 살아 숨 쉬는, 오로지 자신만이 해낼 수 있는 인물을 만들어내며 배우 자신, 더 나아가 후배들이 설자리를 넓혀나가고 있다. 

그런 이정은의 첫 단독 주연작이 1세대 여성 영화인과 중년 여성감독의 삶을 담은 영화 ‘오마주’(감독 신수원)라는 점이 반갑다. 그의 연기를 향한 열정과 진심, 배우로서의 성실함과 진정성, 여성 영화인으로서의 책임감이 이 영화를 더욱 빛나게 했기 때문이다. 

‘오마주’는 1962년과 2022년을 잇는 아트판타지버스터로 한국 1세대 여성 영화감독의 작품 필름을 복원하게 된 중년 여성감독 지완(이정은 분)의 현재와 과거를 넘나드는 시네마 여행을 통해 일상과 환상을 오가는 위트 있고 판타스틱한 여정을 담았다. 신수원 감독이 각본과 연출을 맡았다. 

이정은은 중년 여성감독 김지완으로 분해 배우가 아닌 감독 역할로 또 한 번 새로운 얼굴을 보여준다. 섬세하고 깊이 있는 해석으로 캐릭터에 숨을 불어넣는 것은 물론, 여성 감독, 일하는 중년 여성이 겪는 고민과 상황들을 현실적으로 그려내 공감을 자아낸다. 뿐만 아니라 묵직하게 극을 이끌며 주연배우로서 또 한 번 새로운 가능성을 증명한다.

매 작품 살아 숨 쉬는 인물을 완성하는 이정은. /준필름
매 작품 살아 숨 쉬는 인물을 완성하는 이정은. /준필름

최근 <시사위크>와 만난 이정은은 “시나리오를 읽고 20분 만에 출연을 결정했다”며 ‘오마주’를 향한 남다른 애정을 드러냈다. 또 “주연이라는 점이 부담도 됐지만 내가 시도하지 않으면 후배들에게도 기회가 오지 않을 것 같았다”고 이야기했다.   

-어떤 점에 끌려 작품을 택했나.  
“감독이라는 특수한 직업을 떠나, 일하고 있는 엄마, 아내의 입장에서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가족의 지지를 받고 있진 않지만 실현하고 싶은 청춘의 꿈과 이상을 삶에서 앞으로 어떻게 이어나갈까 고민이 많을 때 볼만한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50대가 넘어서니 그런 문제에 대해 고민이 되기 시작하더라. 좋은 시절을 보내든 아니든 간에,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나리오를 보고 20분 만에 결정했다.”

-보통 그렇게 빨리 결정하는 편인가. 
“제안해주신 분들을 위해 시간을 끌지 않으려고 한다. 대안이 있을 수 있으니 결정을 빨리 하려고 하는데, 이번 영화는 특히 더 빨랐다. 시나리오를 되게 재밌게 읽었다. 결정하는데 망설임은 없었다.”

-신수원 감독의 자전적인 정서를 담은 인물을 연기했다. 캐릭터 구축 과정에서 기존 작품과 다르게 접근한 부분도 있나. 
“보통 사투리가 필요하다거나 자료들이 많이 있는 작품들은 탐구하는 편이다. 그런데 이번 작품은 영화를 연출하고 있는 감독, 사람이 가정과 사회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라 나의 경우와 감독님을 보며 느낀 것들이 섞여있다. 온전히 신수원 감독님을 모델로 삼은 것은 아니고, 내 경험도 반 정도 녹아있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외형도 처음에는 그렇게 감독님과 똑같이 하지 않았다. 꿈을 꾸고 있는 여성이라고 이야기를 해줘서 여전히 이상을 꿈꾸는 영화학도 같은 모습을 유지하길 원했는데, 의상팀과 분장팀에서 제안을 해서 그렇게 하게 됐다. 신수원 감독님이 ‘나랑 너무 똑같아지는 것 아니냐’고 하더니 흔쾌히 안경도 빌려주고 옷도 빌려주고 하더라.(웃음)”

신수원 감독의 자전적인 정서를 담은 인물을 연기한 이정은. /준필름
신수원 감독의 자전적인 정서를 담은 인물을 연기한 이정은. /준필름

-지완이 ‘여성이 영화를 하기에 세상이 많이 좋아졌다’는 1세대 여성 영화인 선배에게 ‘그때보단 나아졌죠’라고 말한다. 배우도 공감하나.  
“나 같은 사람이 주인공을 할 수 있는 시대가 왔다는 것은 많이 나아진 게 분명하다. 그리고 조연을 하고 있는 여자배우들의 역할이 계속 팽창하고 있는 것도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여성 영화인도 많아졌다. 홍은원 감독이 일하고 있을 때는 한 명은 떠나고 한 명은 남아있고 이런 상태였으니까. 지금은 어떤 작품에 대해 고민이 될 때 전화를 할 수 있는 선배도 계시고 하니 그런 점이 좋다. 그리고 지금은 여성이 담배를 피웠다고 검열하고 편집하지 않잖나.” 

-그러한 변화의 중심에서 전형적이지 않은, 여배우에게 잘 주어지지 않는 캐릭터를 많이 소화했고, 또 훌륭하게 해냈다. 여배우, 여성 영화인으로서 책임감도 느끼나. 
“그냥 나한테 역할이 오니 신나서 했는데, 요즘에 책임감을 조금 느끼게 됐다. 신수원 감독님이 그런 말을 했다. ‘정은 씨가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면 후배들도 그런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사실 주인공을 갑자기 하라는 게 부담될 수 있잖나. 그런데 이렇게 시도하지 않으면 다른 친구들에게도 기회가 많이 가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우리들의 블루스’도 선택하기 쉬웠다. 4~5개 에피소드의 메인 역할을 주신다고 했을 때 경험이 쌓이니까 욕심이 나더라. 그리고 노희경 작가님 작품 중에서도 이런 인물이 나오는 게 별로 없었던 것 같아서, 내 나이또래 친구들이나 어떤 역할은 내가 못하지 했던 친구들에게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까 그런 물꼬가 트이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는 노작가님 작품에 출연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노작가님 작품 속 배우들과 내가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약간 반듯하고 드라마에 어울리는, 소위말해 사람들이 주목하고 주인공을 많이 했던 사람이 나온다고 생각했는데, 대본을 받고 배역이 생각했던 것보다 큼지막하게 이야기의 중심에 서 있어서 조금 놀랐다.”

이정은이 고 김영애와의 추억을 떠올렸다. /준필름
이정은이 고 김영애와의 추억을 떠올렸다. /준필름

-영화인 그리고 여성으로서 배우 이정은이 걸어온 길과 유사성도 있었을 것 같고, 공감도 많이 됐을 것 같다. 특히 극 중 지완의 아들이 영화 그만하라고 말을 하기도 하는데, 배우도 포기하고 싶은 순간은 없었나. 
“나는 포기하고 싶은 적은 없었다. 집을 떠나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멈추라고 한 사람이 없었다. 누구도 지지해 주지 않을 때 두 가지 선택이 있는 것 같다. 그냥 관두던가, 어차피 인생 ‘독고다이’인데 가보자는 것. 나는 후자에 해당됐다. 저희 어머니도 터치는 안 하고 ‘네 인생이니 네가 알아서 하라’고 하셨다.

그냥 연기가 좋았다. 안 되니까 재밌더라. 오기가 생기고. 어렸을 때는 연극반에서 공연하고 있으면 선배들이 지나가면서 연습 좀 하라고 하기도 했다. 초창기부터 화려하고 잘했던 배우는 손에 꼽는 것 같다. 나도 그런 배우는 아니었다. 어떤 식으로 하는 선배들이 연기를 잘 하는지 주의 깊게 보고, 어떻게 하면 연기를 잘 할 수 있을지 좇았다. 그게 오마주일 거다. 배우로서.” 

-지완에게 ‘끝까지 살아남아’라는 편집기사의 대사가 인상적이었다. 꼭 영화계가 아니더라도 많은 이에게 응원이 되고 공감되는 말이지 않나 싶은데, 배우에게는 어떻게 다가왔나.
“고(故) 김영애 선생님이 드라마 끝나고 돌아가시기 직전에 내게 그 비슷한 얘기를 하셨다. 계속하라고. 내가 그때 ‘공부를 더 해볼까요?’라고 얘기했을 때 ‘그냥 계속해. 배우를 해. 계속 작품을 해.’ 그게 내게 마지막 유언이셨다. 편집기사가 이야기하는 것과 비슷한 강도인 것 같다. 계속 살아남으라고 하는 게 일등이 되거나 최고가 되라는 게 아니잖나. 네가 좋아하는 것을 계속하고 꿈을 꾸라는 말이니까, 그게 내게는 그때 들었던 선생님의 말씀과 비슷해서 되게 뭉클하기도 하고 기억에 남는다. 그 대사 생각하면 뭉클해진다.” 

-신수원 감독이 ‘이정은은 옆에 친구한테 말걸 듯 연기한다’고 표현하더라. 배우도 동의하나. 연기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   
“노희경 작가님이 ‘정은 씨는 자연스러움을 연기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는 말씀을 하시더라. 머리를 또 한 대 맞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자연스러움은 연기하는 게 아니라 그 상황에 놓이는 거잖나. 누구나 다 자연스럽게 살고 있으니까. 그래서 그런 순리에 맞는 연기가 나오는 것에 주력해야겠다 생각했다. 연기할 때 존재하는 사람이 있다고 믿고 연기한다. 예를 들면 정치가들도 되게 연극적일 때가 있잖나. 우리가 생각하지 않은 어투로 말하는 것도 존재한다. 그런 가능성을 열어두고 연기하려고 한다.

어제 김희원 배우와 친분이 있어서 같이 저녁을 먹게 됐는데, ‘정은 씨가 과장하든 굉장히 줄여서 리얼리티가 있게 만들든, 그냥 믿어진다’고 하더라. 어떤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믿어지게 만든다는 건 좋은 칭찬인 것 같다. 그게 만약 사실이라면 계속해서 그런 작업들을 하고 싶다. 터무니없이 보이는 역할을 믿어지게 만들 수 있다면 배우로서 정말 좋은 것 아니겠나.” 

이제는 믿고 보는 배우 이정은. /준필름
이제는 믿고 보는 배우 이정은. /준필름

-시나리오에 쓰인 캐릭터에 이입하는 편인가, 이정은화하는 편인가. 
“나와 역할의 차이를 뚜렷하게 인식하려고 한다. 절대적으로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최근 내가 갖고 있는 저돌성, 과감함 때문에 그런 역할을 많이 주시는데, 사실 나는 되게 좀생이 같고 소심하다. 그래서 캐릭터와 나 사이 간극을 늘 느끼면서 하는 것 같다. 물론 그 역할을 통해 가끔 배포가 커지기도 하지만 현실로 돌아오면 나는 그 여자보다 되게 간이 작구나 느끼기도 하고 그렇다.”

-그런 배포가 큰 여성을 담을 수 있는 배우이기 때문에 그런 역할도 잘 해낼 수 있는 게 아닐까.  
“나는 그렇게 못산다. 그냥 배우는 것 같다. 그런 인물을 통해 배우고 다시 한 번 환기하는 것 같다. 그렇게 삶을 사는 사람에게 악수를 요청해서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 같다. 나는 그렇게 선택을 과감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어렸을 때 제일 해보고 싶던 역할이 독립운동가였다. 손톱을 다 떼내는데 한 마디도 안 불 수 있는 자신이 과연 있을까 한 번 실험해 보고 싶었다. 지금도 그게 의문이다. 나는 과연 그런 사람일 수 있을까.”  

-연기적 동력은 무엇인가.  
“이야기와 사람이다. 사람을 좋아한다. 사람이 중심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일이든. 그것을 이쪽 장르로 전공을 살려 일을 하고 있는 원동력은 사람들 사이에서 나오는 이야기 때문인 것 같다. 배경이 우주적인 이야기더라도 다 사람에게 근거한 이야기들이라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 같고, 그런 이야기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연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야기도 무궁무진하잖나.” 

-앞으로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 싶나. 
“모든 채널은 다 열어놓고 생각한다. 활동할 수 있는 영역에서 계속적으로 넓혀나가는 작업을 하고 싶다. 옛날과 다르게 새로운 시도를 하고 싶어 하는 분들이 있고, 그런 부분을 내가 맡아도 나쁘지 않겠다는 도전 욕구가 생기는 것 같다. 그게 꼭 계속 주인공을 할 거야라는 것은 아니다. 해보지 않은 영역을 계속 넓혀가야 우리가 같이 공생할 수 있을 것 같고, 더 많은 친구들이 다른 시도를 같이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이야기도 더 풍요로워질 것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