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운전자가 의무를 다한 상황에서 무단횡단 사고가 발생했다면 운전자에게 무죄를 선고하는 판례가 이어지고 있어 관심이 집중된다. 사진은 25일 서울 중구 서울광장 앞 도로에서 열린 어르신 먼저인 보행문화 정착 위한 '안전보행 다짐대회'에서 스턴트맨이 무단횡단으로 인한 어르신 교통사고 장면 재현을 하고 있는 모습. / 뉴시스
최근 운전자가 의무를 다한 상황에서 무단횡단 사고가 발생했다면 운전자에게 무죄를 선고하는 판례가 이어지고 있어 관심이 집중된다. 사진은 25일 서울 중구 서울광장 앞 도로에서 열린 어르신 먼저인 보행문화 정착 위한 '안전보행 다짐대회'에서 스턴트맨이 무단횡단으로 인한 어르신 교통사고 장면 재현을 하고 있는 모습. / 뉴시스

[시사위크=김민성 기자] 보행자가 ‘빨간불’에 횡단보도를 건너다 교통사고를 당해 식물인간 상태에 빠지게 됐다면 운전자에겐 어떤 처벌이 내려질까. 법원은 ‘무죄’를 선고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무단횡단 사고의 책임을 교통법규를 준수한 운전자에게 물을 수 없다는 것으로, 사고에 보행자의 책임도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서울북부지법 형사10단독 김재근 판사는 교통사고처리특례법 위반(치상)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A씨(38)에게 무죄를 선고했다고 27일 밝혔다.

법원에 따르면 사고가 발생한 것은 지난 1월 29일 오전 11시 13분께. 서울 동대문구에서 왕복 6차로 도로를 주행 중이던 A씨는 보행신호가 ‘빨간불’인 상황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던 피해자 B씨(58)를 발견하지 못하고 들이받았다. 당시 피해자 B씨는 좌측에서 우측 방향으로 무단횡단을 했는데, A씨는 자신의 차량 좌측에서 10m 정도 앞질러 달리던 버스로 인해 횡단보도를 건너오던 B씨를 볼 수 없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이 사고로 인해 피해자 B씨는 뇌 손상·골절·내장출혈 등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끝내 식물인간 상태에 빠졌다. 
 
이에 검찰은 운전자 A씨를 교통사고처리특례법 위반(치상) 혐의로 기소했다. ‘횡단보도에서의 보행자 보호의무’를 위반했다는 것이 이유다. 검찰은 당시 차량 직진신호이기는 했지만, 횡단보도를 지날 때는 서행을 하면서 주위를 살필 의무가 운전자에게 있는데 A씨가 이 의무를 게을리 해 사고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현행법 상, 자동차 운전자는 횡단보도에서 보행자를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 만일 자동차 운전을 하다가 횡단보도에서 보행자를 추돌하는 사고가 발생되면 ‘교통사고처리특례법 위반’으로 처벌받게 된다. ‘횡단보도 보행자 보호의무’ 위반은 12대 중과실 중 하나로, 업무상과실치사상 또는 중과실치사상 혐의로 기소당하고 형사재판을 받게 된다.  

법원은 그러나 검찰과 다른 판단을 내렸다. 이 사고에 보행자의 책임도 있다고 본 것이다. 서울북부지법 형사10단독 김재근 판사는 판결문을 통해 “보행자 적색신호임에도 보행자(피해자 B씨)가 왕복 6차로의 도로를 무단횡단하는 것은 이례적”이라며 “당시 신호에 따라 정상적으로 운행하던 피고인(운전자 A씨)으로서는 이를 예상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또 A씨의 좌측에 버스가 주행하고 있어 시야 확보가 어려웠던 점도 참작했다. 재판부는 “A씨가 사고를 막으려면 최소 45.05m 거리에서 보행자를 발견해야 하지만 당시에는 20m밖에 확보돼 있지 않았던 점을 참작해 무죄를 선고했다”고 덧붙였다. 

과거에는 보행자가 무단횡단을 하다 사고가 나더라도 운전자에게 책임을 물었지만, 최근엔 이와 정반대의 판결이 이어지고 있는 추세다. 실제 지난 3월 무단횡단을 하던 60대 여성을 차로 치어 숨지게 한 혐의(교통사고처리특례법 위반)로 기소된 화물차 운전자는 ‘사고를 피하기 위한 거리가 확보되지 않은 점’ 등을 이유로 무죄가 선고됐다. 수원에선 중앙분리대에 다리를 걸친 채 도로에 누워있던 70대 노인을 밟아 숨지게 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50대 버스기사에게 무죄가 선고됐다. 운전자가 교통법규를 잘 지킨 상태에서 보행자의 무단횡단으로 인한 교통사고는 ‘운전자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거나 예상치 못한 돌발상황일 경우’로 본 것이다.

경찰청 등에 따르면 지난 한 해 동안 무단횡단 사고는 9,590건에 달했다. 562명이 목숨을 잃었다. 해마다 줄고 있는 추세라고는 하지만, 여전히 하루 1명 이상이 무단횡단을 하다가 목숨을 잃는 셈이다.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귀찮아서” “바빠서” 등 안일한 생각에 위험한 질주를 감행하는 것이다. 

경찰청 관계자는 “도로교통법에서는 보행자가 반드시 횡단시설을 이용해 도로를 건너도록 하고 있다”며 “‘괜찮겠지’라는 안전불감증은 자칫 끔찍한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보행자의 교통법규 준수는 운전자의 의무만큼이나 중요하고”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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