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종 중앙일보 통일전문기자.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전문기자.

북한이 지난해 2월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서 발생한 ‘김정남(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이복형) 암살 사건’과 관련해 베트남 정부에 비공식적인 사과의 뜻을 전한 것으로 파악됐다. 김정남 암살 사건에 베트남 여성을 끌어들인 데 대한 유감의 표시다. 이런 북한의 움직임은 뒤늦게나마 김정남 암살 사건의 배후에 자신들이 있음을 시인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말레이시아 수사당국이 철저한 수사를 통해 북한이 암살 배후라고 지목했지만, 북한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발뺌해 왔다.

김정남 암살은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북한 당국이 얼마나 잔혹한 범죄 집단인지, 그리고 권력 유지를 위해서라면 어떤 불법무도한 일도 저지를 수 있는 체제인지를 여실히 드러냈다. 특히 권력 장악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되면 이복형까지도 무참히 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국제사회는 경악했다. 이와 함께 북한의 열악한 인권상황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는 계기가 됐다.

공교롭게도 북한이 김정남 암살과 관련해 베트남에 유감을 표시했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은 장성택 처형이 이뤄진지 꼭 5년이 되는 시점이었다.

김정은은 집권 이듬해인 2013년 12월, 고모부인 장성택을 반국가혐의와 부패 등을 이유로 공개처형했다. 해외 유학 경험이 있는 젊은 지도자는 뭔가 다를 것이라며 개혁·개방 가능성에 외부세계의 시선이 쏠려있던 상황에서 벌어진 잔혹한 숙청은 북한의 새로운 리더십에 대한 기대감을 일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5년이 지났지만 당시의 충격은 쉽게 잊히지 않고 있는 모습이다. ‘설마 고모부를 죽이기야 하겠느냐’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던 국면에서 나온 북한 관영매체의 보도는 충격이었다. 당시 조선중앙방송은 판결문 내용을 전하면서 “국가안전보위부 특별군사재판소는 피소자 장성택을 사형에 처하기로 판결하였다. 판결은 즉시 집행되었다”라며 처형 소식을 알렸다.

장성택 처형 이후 핵심 고위간부층 내부에서는 김정은의 공포정치에 대한 불안감이 확산됐다. 김정은이 고모부 장성택도 처형하는 모습을 본 뒤 간부들 사이에 ‘우리는 파리 목숨’이란 생각이 퍼졌다는 것이다. 측근 노간부들도 김정은의 비위맞추기에 몰두해 김기남 당시 노동당 비서가 ‘오묘하고 신비로우십니다’라는 말을 김정은에게 쏟아내고 있다는 첩보까지 우리 당국에 입수되기도 했다. 숙청의 두려움에 사의를 표한 한 조직지도부 고위간부는 사표가 반려된 뒤 처벌당했다고 한다.

은밀한 방법으로 이복형을 살해하고 자신의 후견인 역할을 하던 고모부를 잔혹하게 처형한 대가는 결코 작지 않았다. 김정은 위원장은 지난해 11월 말 이후 핵과 미사일 도발을 멈추고 국제사회를 향해 화해와 대화·협력의 손짓을 하고 있다. 하지만 1년 넘은 그의 노력에 대해 국제사회는 냉담한 시선을 보내고 있다. 지난 6년 간 그가 벌여온 잔혹한 숙청과 인권탄압이 미소 속에 감춰진 본 모습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거두지 않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김정은 체제의 북한 인권 실태를 비판하는 국제사회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유엔 총회 인권 담당인 제3위원회는 지난 11월 15일 북한 정권의 인권침해를 강도 높게 비판하면서 주민들에 대한 억압적 조치의 즉각 중단과 개선을 촉구하는 대북 인권결의안을 통과시켰다. 회원국 가운데 어떤 나라도 표결을 요청하지 않은 상황이라 컨센서스(전원동의) 형태로 채택이 이뤄졌다. 유엔 차원의 대북 인권결의안 채택은 2005년 시작돼 이번까지 14년 동안 이어지고 있다.

대북 인권결의는 올 한해 김정은 위원장이 공들여온 대남, 대미 유화분위기 조성과 궤를 달리한다고 볼 수 있다. 북한의 대외 전략·전술 변화에도 불구하고 인권 상황에는 특별한 진전이 없다는 판단이 내려진 듯 지난해 결의안의 기조나 문구가 유지되고 있다는 게 외교 당국자들의 귀띔이다. 대북 인권결의안은 “북한에 오랜 기간에 걸쳐, 그리고 현재까지도 조직적이고 광범위한 중대 인권침해가 자행되고 있다”고 규탄하는 입장을 담고 있다. 정치범 등을 가둔 강제수용소의 즉각적인 폐지와 정치범 석방, 인권침해에 책임 있는 가해자들에 대한 처벌과 책임규명 등을 요구하는 내용이다.

이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유엔 안보리가 북한 인권조사위원회(COI)의 결론 및 권고사항을 검토하고, 책임규명을 위한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하고 있는 대목이다. 북한 인권조사위원회는 북한 인권 문제를 국제형사재판소(ICC)에 회부하고, 인도에 반하는 범죄 행위의 ‘가장 책임 있는 자’에 대한 선별적 제재를 권고하고 있다. 여기서 ‘가장 책임 있는 자’란 대목은 사실상 김정은을 지칭하는 것이다.

올해 초부터 김정은 위원장은 우리와 국제사회를 향해 올리브가지를 흔들며 유화적 제스처를 취해왔다. 신년사에서 대남, 대외관계의 개선을 위한 운을 뗀 그는 평창 동계올림픽을 발판으로 남북 정상회담을 개최했고, 워싱턴과 베이징을 향한 정상외교에도 시동을 걸었다.

이 과정에서 ‘완전한 비핵화’를 거듭 약속했고, 경제·핵 병진 노선의 수정을 통한 민생 챙기기에 나설 것이란 기대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여동생인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을 특사로 남한에 파견한 것을 시작으로 서울 답방이나 교황 평양 초청 같은 전향적인 조치를 잇달아 내놓음으로써 개혁·개방 노선으로 향할지 모른다는 관측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북한의 열악한 인권상황에 대한 유엔과 국제사회의 비판과 지적은 그 문턱이 낮아지지 않았다.

남북 간 화해 분위기와 한반도 정세 흐름 속에서 김정은과 북한 체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둘러싼 우리 사회의 논쟁과 갈등은 현재 진행형이다. 김정은 서울 답방을 놓고도 서울 도심에서 환영 일부 진보성향의 행사와 방문 반대 집회가 잇달아 열리고 있다. 남북 간 화해와 교류·협력의 분위기를 살려나가고 한반도 평화를 가꿔 나가는 건 우리 사회가 추구해야 할 소중한 가치의 하나일 수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유엔 등 국제사회가 제기하는 북한 인권에 대한 합리적 문제제기와 보편적 인권가치에 대한 존중 또한 중요하다.

거듭되는 남북 정상회담과 교류·협력의 움직임 속에서 우리가 북한 체제와 김정은을 어떻게 바라보고 평가해야 할 것인가 하는 진지한 고민을 해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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