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노무현 전 대통령 추도식 참석을 계기로 방한해 문재인 대통령과 만난다. /뉴시스-신화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노무현 전 대통령 추도식 참석을 계기로 방한해 문재인 대통령과 만난다. /뉴시스-신화

시사위크=정계성 기자  북한의 핵 개발 역사는 소련의 붕괴부터 시작된다. 공산 진영의 맹주였던 소련의 해체는 북한의 안보위기를 불러왔고, 체제보장을 위해 핵을 보유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1993년 NPT를 탈퇴하며 북한이 핵 개발 노선을 공식화하자, 미국과 국제사회가 나선다. 북한이 핵 동결과 관련시설의 해체, IAEA의 감시를 받는 대신 미국은 북미관계를 개선하고 경수로 건설을 지원하는 내용이 담긴 합의를 한다. 1994년 10월 제네바 북미 합의다.

‘제한적’이었던 평화는 2002년 깨진다. 2001년 9.11 테러 후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군사행동이 포함된 강경한 대외정책을 펼친다. 특히 북한과 이란, 이라크를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하고 이들 국가와 협력하지 말 것을 국제사회에 요구했다.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조지 W 부시는 “악의 축”이라고 규정했는데, 이른바 ‘부시 독트린’이라는 명칭이 붙은 배경이 됐다.

부시 독트린에 따라 ‘제네바 북미 합의’가 흔들리게 됐다. 제네바 합의는 플로토늄에 대한 통제는 가능해도 북한의 고농축 우라늄 핵 프로그램은 막을 수 없다는 이유였다. 정세현 당시 통일부 장관은 미국 측이 확실한 근거 없이 북한 측의 우라늄 프로그램을 의심했는데, 북한이 여기에 거칠게 맞대응하면서 파국을 맞은 것으로 회고한다.

정 전 장관에 따르면, 협상 테이블에서 미국의 압박에 북한은 ‘NPT를 탈퇴했기 때문에 자신들은 핵을 보유할 자격이 있다’고 받아쳤다고 한다. 그런데 북측의 통역을 담당한 인사가 ‘자격’을 빼놓는 바람에 ‘핵을 보유하고 있다’는 뉘앙스로 미국 측에 전해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렇지 않아도 북한을 의심하던 미국 입장에서는 북한이 ‘실토’를 한 것으로 해석했다. 공교롭게도 미국 측 대표부 일원으로 제네바 합의를 깬 주역이 존 볼턴 현 백악관 안보보좌관이며, 당시 북측의 통역을 담당했던 인사가 최선희 현 외무성 부상이다. 하노이 협상이 결렬되고 두 사람의 발언이 격앙되자 미국 언론에서 “투견들이 풀렸다”고 표현한 데는 이 같은 배경이 자리하고 있다.

북한이 우라늄 개발을 자백했다고 판단한 미국의 다음 행보는 거침없었다. 북한에 대한 군사적·경제적 압박에 동참을 요구했고, 한반도에너지개발(KEDO) 사업도 끝내 중단하게 했다. 당시 미국 측 인사로 사업에 참석했던 한 한국계 교수는 “경수로를 짓는 동안 만큼은 평화가 유지됐기 때문에 그 자체로 의미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면서도 “불완전했던 제네바 합의가 언젠가는 깨질 것이라는 것을 미국은 물론이고 북한도 알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전 정부에서 했던 이란 핵협상에 대해 “불완전 하다”며 폐기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후 한반도를 둘러싼 동아시아 안보환경은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됐다. 북한은 최고지도자 사망, 기근, 식량부족, 권력다툼 등의 내부적 문제를 군사적 긴장을 조성함으로써 돌파했고, 그에 맞춰 미국과 국제사회의 군사적·경제적 압박 강도 역시 높아졌다. 부시 전 대통령의 ‘부시 독트린’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오바마 행정부에서는 ‘피벗 투 아시아’ 정책에 따라 중국과의 관계설정이 중요한 이슈로 떠올랐으며, 북한 핵 문제는 사실상 대중관계의 종속변수가 됐다.

한반도 긴장의 핵심 책임자라고 할 수 있는 부시 전 대통령은 ‘출구’도 열어놨었다. 바로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이다. 핵 목록 제출과 완전한 비핵화를 전제로 북한체제를 보장하는 한반도 항구적 평화시대가 열릴 수 있다는 게 핵심내용이었다. 이는 2007년 남북정상회담에서 나왔던 ‘한반도 항구적 평화체제’나 문재인 대통령의 ‘신 베를린 선언’ 구상의 사실상 기초가 됐다.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이었던 문재인 대통령이 이를 누구보다 정확히 파악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종전선언을 비핵화 협상의 입구에 놓느냐, 출구에 놓느냐의 선후 입장차는 존재하지만 지금의 협상도 큰 틀에서는 다르지 않은 셈이다.

한반도와 동아시아 안보에 큰 영향을 미친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오는 23일 한국을 찾는다. 협상 파트너였던 노무현 전 대통령 추도식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퇴임 후 화가로 전직한 부시 전 대통령은 노무현 전 대통령 초상화를 그려 권양숙 여사에게 선물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에 앞서 문 대통령과도 만난다. 지금의 북미협상과 남북관계에 대해 그는 어떠한 평가를 내릴까. 멈춰선 북미협상 재개의 물꼬를 틀 수 있을까. 문 대통령과 부시 전 대통령의 만남이 기대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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