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전 대통령의 아들 재헌 씨가 광주의 5·18민주묘지를 찾아 사죄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그 배경에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 국립 5·18민주묘지관리소
노태우 전 대통령의 아들 재헌 씨가 광주의 5·18민주묘지를 찾아 사죄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그 배경에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 국립5·18민주묘지관리소

시사위크=소미연 기자  지난 23일, 국립5·18민주묘지관리소에 참배를 위한 안내를 부탁하는 한중문화센터 측의 전화가 걸려왔다. 2시간 뒤 약속한 일행이 5·18민주묘지에 도착했다. 일행 중에는 노태우 전 대통령의 아들 재헌 씨가 포함돼 있었다. 한중문화센터 원장이 바로 그였다.

재헌 씨는 윤상원·박관현 열사의 묘역을 차례로 참배했다. 윤상원 열사는 5·18 당시 시민군 대변인으로 옛 전남도청을 지키다 계엄군에 희생당했고, 전남대 총학생회장이었던 박관현 열사는 광주교도소에서 눈을 감았다. 계엄군이 쏜 총탄에 숨진 초등학교 4학년 전재수 군의 묘역도 찾았다. 5·18민주화운동 책임자와 그 가족 중에서 오월 영령 앞에 무릎을 꿇은 첫 사례다.

◇ 징역형 사면, 추징금 완납… ‘남은 과업은 사죄 뿐’

재헌 씨의 5·18민주묘지 참배는 부친인 노태우 전 대통령의 뜻을 반영한 것으로 알려졌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5·18민주묘지에 참배할 의사를 여러 차례 나타냈다는 것. 하지만 고령인데다 오랜 투병 생활에 광주 방문이 어렵게 되자 재헌 씨가 대신 사죄하는 것으로 과업을 덜었다. 재헌 씨는 방명록에 “진심으로 희생자와 유족분들께 사죄드리며 광주 5·18 민주화운동의 정신을 가슴 깊이 새기겠다”고 적었다.

이 같은 사실이 뒤늦게 전해지면서 노태우 전 대통령의 병세가 악화된 게 아니냐는 해석이 나왔다. 실제 노태우 전 대통령은 10년 넘게 공식석상에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 여기에 의사소통마저 불편한 상태로 알려진 게 벌써 5년 전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첫 문병 소식으로 화제가 되면서 눈 깜빡임으로 의사를 표시하는 노태우 전 대통령의 모습이 보도된 바 있다. 그때도 전두환 전 대통령 측은 “더 늦기 전에 찾아갔다”고 설명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2011년에 발간한 회고록을 통해 “5·18 민주화운동이 유언비어 때문에 발생했다”고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투병 생활이 길어지면서 생각이 바뀐 것으로 보인다. 아들 재헌 씨가 오월 영령들을 참배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 뉴시스
노태우 전 대통령은 과거 회고록을 통해 “5·18 민주화운동이 유언비어 때문에 발생했다”며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투병 생활이 길어지면서 생각이 바뀐 것으로 보인다. 아들 재헌 씨가 오월 영령들을 참배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 뉴시스

노태우 전 대통령이 과거와 사뭇 달라진 입장도 주목할 만하다. 2011년에 발간한 회고록에선 “5·18 민주화운동이 유언비어 때문에 발생했다”고 주장해 폄훼 논란을 일으켰던 것. 앞서 노태우 전 대통령은 전두환 전 대통령과 함께 12·12 군사반란과 5·18 민주화운동으로 반란죄·내란죄 혐의를 받고 재판을 받았다. 그 결과, 대법원에서 징역 17년이 확정됐으나 1997년 12월 특별사면됐다.

따라서 노태우 전 대통령이 사죄로 마음을 돌린 것은 사후 국립현충원 안장 시 걸림돌을 치우기 위한 게 아니냐는 얘기가 많다. 현재 노태우 전 대통령은 전직 대통령의 서훈과 예우가 취소된 상태다. 하지만 사후 국립현충원 안장 여부에 대해선 논란의 여지가 있다. 현행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내란죄 등으로 금고 이상의 실형 확정자는 안장을 금지하나, 사면된 경우에 대해선 명시적인 규정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국민정서에 좌우될 가능성이 높다.

해당 내용은 사실 오래전부터 나왔던 얘기다. 2013년 6월, 노태우 전 대통령의 부인 김옥숙 씨가 대검찰청과 서울중앙지검에 탄원서를 제출했을 때부터다. 김씨가 노태우 전 대통령의 동생 재우 씨와 사돈 관계였던 신명수 전 신동방그룹 회장에게 맡긴 재산을 환수해 미납 추징금을 완납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달라고 호소하자 국립현충원 안장에 대한 노태우 전 대통령의 바람이 큰 것으로 해석됐다.

김씨의 탄원서로 촉발된 검찰 수사에 재우 씨와 신명수 전 회장은 당시 노태우 전 대통령의 미납 추징금 231억원을 대신 내기로 결정했다. 이로써 노태우 전 대통령은 법원 선고 16년 만에 2,628억원의 추징금을 완납할 수 있었다. 처벌을 모두 끝낸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남은 과제는 역사적 과오에 대한 인정과 사죄였다. 이를 아들 재헌 씨가 대신한 셈이다. 5·18민주묘지를 찾은 재헌 씨는 자신이 사죄하는 모습을 사진으로나마 부친에게 보여주려 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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