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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의 ‘평양에선 지금’] 재난 대처에 적극 나선 김정은, 민심잡기 성공할까
[이영종의 ‘평양에선 지금’] 재난 대처에 적극 나선 김정은, 민심잡기 성공할까
  •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장
  • 승인 2020.08.31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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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장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장

올여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부산하다. 유달리 많은 횟수의 회의를 진행하며 이런저런 정책 점검에 나선 데다, 현장 방문 일정도 많아졌다. 

지난 4월 하순 20일간의 공개활동 공백으로 건강 이상 관측과 유고설까지 나왔던 데 비하면 큰 변화다. 5월 1일 순천인비료공장 준공식 참석으로 건재를 과시한 이후 5월과 6월 각 2차례에 불과하던 통치 활동 보도가 7월 들어 부쩍 늘어났다. 7, 8월 두 달간 14차례가 넘는 동정 보도가 관영 매체를 통해 쏟아졌다.

그 가운데 눈길을 끄는 건 수해현장을 직접 찾았다는 점이다. 태풍 ‘바비’가 휩쓸고 간 황해남도 지역을 돌아본 김정은 위원장이 ”태풍 8호에 의한 피해 규모가 예상했던 것보다 적다. 걱정이 태산 같았는데 이만한 것도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는 게 28일 자 노동신문 보도다. 김정은 위원장은 앞서 8월 초에도 수해가 난 황해북도 은파군 대청리 일대를 돌아봤다. 이 자리에서 ”국무위원장 예비 양곡을 해제해 피해지역 인민들에게 세대별로 공급하라“고 지시했다는 게 7일 자 북한 매체가 전한 내용이다.

김정은이 집권 이후 재난 현장을 직접 찾은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 2015년 8월 태풍 ‘고니’로 함북 나선시 지역에서 큰 수해가 났을 때, 해당 지역을 찾아 주민과 군인 건설자들을 격려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엔 피해 직후 현장을 찾은 게 아니라, 수해 26일이 지난 시점에 복구를 위해 주택건설 공사가 한창이던 곳을 방문한 것이었다. 올해의 경우 피해가 나자마자 즉각 현장을 찾아 상황을 파악하고, 수행한 간부들에게 복구 계획을 구체적으로 지시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런 상황은 김일성·김정일 집권 시기와는 차이가 난다. 특히 아버지인 김정일 국방위원장 집권 기간엔 홍수나 다른 재난이 발생했을 경우 최고지도자가 직접 현장에 나가거나 구체적인 구호 및 복구 지시가 알려지는 일이 없었다. 권위 있는 통치자의 모습을 부각시키는데 초점을 두다 보니 나타난 결과였다. 

이는 3대 세습에 의한 권력승계자라는 한계와 비판에도 불구하고 선대 지도자와는 차별화가 드러나는 행보라 평가할 수 있다. “단층 살림집 730여동과 논 600여 정보 침수”(8월 7일 노동신문)처럼 피해 상황을 구체적으로 알리는 것도 이전과는 다르다.

물론 재난 현장을 찾아 피해 상황을 살피고 주민을 위로하는 건 서방국가에선 당연한 일이다. 최근 지구촌 곳곳에서 예기치 못한 사고와 재난, 감염병 등이 발생하고 있고, 이런 상황에 정부와 최고지도자가 얼마나 기민하게 대처하느냐는 권력이 국민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지 없는지를 판가름하기도 한다. 

이처럼 국제 사회에선 당연시되는 사안이지만, 폐쇄사회 북한의 최고지도자가 이전과 달리 재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모습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구석도 있다.

몇 가지 아쉬운 대목도 있다. 첫째, 현장을 찾은 자리에서 주민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이다. 어렵사리 수해 현장을 찾았다면 피해 상황 파악을 현지 관료나 수행 간부로부터 듣는 것뿐 아니라 주민들의 호소를 듣고 아픔을 위로하는 장면이 드러나야 한다. 하지만 북한 매체가 공개한 김정은 위원장의 현장 사진에는 말끔한 차림의 최고지도자와 수행 간부, 그리고 몇몇 현지 관계자만이 등장한다.

북한도 ’인민의 아픔을 위로하는 지도자‘란 이미지를 연출하기 위해 애쓴 흔적이 드러나기는 한다. 은파군 수해현장을 찾은 김정은 위원장은 일본 렉서스의 대형SUV를 타고 있다. 북한 선전 매체들은 진흙에 빠질 수 있는 포전(논밭) 길을 가면 위험하다고 만류했지만, 김정은이 직접 운전해 현장을 찾았다고 전한다.

둘째, 만성적인 경제난과 식량난, 재난 피해 등의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북한의 경제 시스템이 전근대적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사실이 곳곳에서 드러난다는 점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조속한 수해 복구를 지시하며 ‘국무위원장 예비 양곡’ 뿐 아니라 “국무위원장 전략예비 물자를 해제해 보장하라”고 강조했다. 유엔 전문기구가 ”북한 주민의 40%인 1,100만 명이 만성적인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다“고 최근까지 보고서를 통해 경고하고 있는 상황에서 최고지도자 몫의 양곡과 전략물자가 따로 챙겨져 있다는 건 안타까운 부분이다.

국무위원장 ‘몫’이라고 하는 ‘예비 양곡’이나 ‘전략물자’는 아마도 과거 김일성 시대부터 내려온 ‘주석 폰드’의 유물인 것으로 판단된다. 식량이나 시멘트·철강 등을 일정 물량 비축해뒀다가 김일성 주석이 특별히 필요로 하는 지역이나 기관에 공급해주는 물자를 주석 폰드로 불러왔다는 게 고위 탈북 인사들의 전언이다. 

하지만 이젠 시대가 달라졌다. 봉건 왕조시대도 아니고 어느 국가나 체제가 절대권력자의 내탕금처럼 쌀과 건설자재를 따로 챙겨놓았다가 시혜 차원으로 내놓는 경우가 있을까 하는 점을 김정은 위원장이 살펴보았으면 한다. 

그리고 굶주리고 필요한 곳에 즉각 공급했으면 한다. 전략 비축물자가 필요하다면 잉여분의 물자를 군주의 이름이 아니라 국가 체제의 공공재 형태로 준비해 두는 게 맞다.  

셋째, 재난을 당한 주민의 안타까운 상황과 절박함을 헤아려 피해자 중심으로 모든 걸 판단하는 게 필요하다. 김정은 위원장은 수해 관련 노동당 대책회의를 주재하면서 “일체의 외부지원을 허용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북한의 수해 상황에 대해 한국과 국제사회, 인도지원 단체가 대북 지원을 검토하고 있는 상황에 찬물을 끼얹은 것이다. 

김정은은 그 이유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코로나19) 유입 가능성을 들었다. 하지만 물자의 이동을 통해 코로나가 전파되는 경우는 드물고, 철저한 방역 조치로 얼마든지 막을 수 있다. 민생을 최우선으로 챙기겠다며 수해현장을 순발력 있게 찾으면서도 피해를 하루빨리 가시게 할 수 있는 외부지원을 거부하는 건 맞지 않다.

북한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어려운 상황을 맞고 있다. 국제사회의 대북제재로 어려움이 큰 상황에서 연초부터 닥친 코로나19 방역으로 ‘셀프제재’라 할 정도의 고립 국면에 처했다. 오는 10월 10일 노동당 창건 75주년에 맞춰 완공하려던 건설 프로젝트도 줄줄이 차질을 빚거나 연기되고 있다. 

무엇보다 김정은이 직접 지시한 사업까지 문제가 생기는 건 이상 신호다. 2016년 노동당 7차 대회에서 제시한 경제발전 5개년 계획이 올해 마무리돼야 하지만 이대로라면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들 수밖에 없다. 고육지책으로 북한은 김정은 위원장이 8월 19일 주재한 노동당 전원회의에서 “국가 경제 장성 목표들이 심히 미진 되고, 인민생활이 뚜렷하게 향상되지 못하는 결과가 빚어져다”고 자인하며 내년 1월 노동당 8차 대회 개최를 알렸다. 일단 시간벌기에 나선 듯하다.

북한은 미국을 탓하고 한국 정부를 원망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 모든 상황은 김정은이 자초한 일이다. 집권 초반 국제사회의 개혁·개방 기대를 걷어차고 핵과 미사일 개발에 매달린 결과 전례 없이 강화된 대북제재를 자초했다. 북·미 정상회담과 남북 정상회담 등의 테이블도 ‘핵 포기 불가’를 고집하다 산통이 깨지는 국면에 빠졌다.  

이제 북한 체제가 생존하고 김정은이 권력을 어느 정도라도 유지하려면 뼈를 깎는 평양 지도부의 변화가 불가피하다. 세상은 핵무기가 힘의 상징이던 냉전 시대를 넘어선 지 오래다. 이젠 인공지능(AI)과 사활을 건 경제·무역 전쟁, 감염병 공동대처 등으로 경쟁하면서도 협력해야 하는 새로운 장이 펼쳐지고 있다. 재난에 대처하는 36살 청년지도자 김정은의 긍정적인 작은 변화가 북한의 개혁·개방과 변혁을 이끄는 기폭제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