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권.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권리를 뜻하는 말이다. 누구나 당당하게 누려야 할 권리지만 교통약자인 장애인들에겐 쉽게 손에 잡히지 않는 권리다. 거리의 각종 높은 턱과 취약한 교통수단은 이들의 자유롭게 거리를 다닐 수 있는 권리를 제한하기 일쑤다. 2005년 ‘교통약자 이통편의 증진법’이 제정된 후, 장애인들의 이동권 보장을 위한 시스템이 개선되고 있지만 아직은 갈 길이 멀다. <편집자주>

우리 사회가 코로나19 방역에 몰두하는 사이, 시각장애인들의 이동권 문제는 소외받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뉴시스 

시사위크=이미정 기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는 우리 일상의 풍경을 변화시켰다. 이제는 어느 곳을 가든, 전자출입명부(QR코드) 인증을 하거나 수기로 출입명부를 기록하는 게 낯선 풍경이 아니게 됐다. 무인결제 시스템도 우리 일상에 자리 잡고 있다. 코로나19 사태로 비대면 문화가 확산되면서 사람이 아닌, 기계로 주문을 하거나 결제를 하는 매장이 대폭 늘어났다. 

여기에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한 각종 예방 대책들도 우리 삶에 스며들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출입하는 공공시설이나 대형 건물들은 철저한 출입 관리와 항균필름 부착 등의 방식으로 코로나19 확산 예방에 대응해 오고 있다. 그런데 우리 사회가 코로나19 방역에 몰두하는 사이, 시각장애인들의 이동권 문제는 소외받고 있다는 지적이 높다.

◇ 시각장애인, 코로나 이후 이동 위축… “QR코드 출입인증 장벽에 막혀”
 

약시 시각장애인인 남정한 실로암장애인자립생활지원센터 소장은 최근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을 찾았다가 QR코드 인증을 하는 과정에서 한참 애를 먹었다고 고백했다. 남 소장은 <시사위크>와의 전화인터뷰에서 “어머니는 진료 예약이 돼 있어서 바로 병원에 들어갔지만 저는 QR코드 인증이 잘 안 돼서 한참 시간이 걸렸다”며 “병원의 경우, (제가 주로 출입하는 시설과) 코드 인증 방식이 다르다보니 더 힘들었다”고 토로했다. 

코로나19 사태에 따라 다중이용 시설을 이용하려면 QR코드를 인증하거나 수기명부를 작성하게 됐다. 시력이 현저히 낮거나 앞을 볼 수 없는 시각 장애인들에게 QR코드 인증은 쉽지 않은 일이다. 휴대전화기에 발급된 QR코드를 인식기에 정확히 맞춰 인식시키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수기로 명부를 작성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코로나19 사태에 따라 다중이용 시설을 이용하려면 QR코드를 인증하거나 수기명부를 작성하게 됐다. 시력이 현저히 낮거나 앞을 볼 수 없는 시각 장애인들에게 QR코드 인증이나 수기 작성에 크게 애를 먹고 있다. 사진은 이해를 돕기 위한 것으로,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음. /동작구
코로나19 사태에 따라 다중이용 시설을 이용하려면 QR코드를 인증하거나 수기명부를 작성하게 됐다. 시력이 현저히 낮거나 앞을 볼 수 없는 시각 장애인들에게 QR코드 인증이나 수기 작성에 크게 애를 먹고 있다. 사진은 이해를 돕기 위한 것으로,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음. /동작구

이에 시각장애인들은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릴 수밖에 구조라고 시각장애인들은 설명한다. 하지만 이 또한 장애인들에게 상당한 부담이라고 한다. 종업원이나 다른 사람에게 부탁을 해야 하기 때문에 심리적인 부담이 있는데다 개인정보까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노출하게 되는 상황을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시각장애인인 홍서준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연구원은 “QR 인증을 하든, 수기로 작성을 하든 시각장애인들에게 모두 힘든 일”이라며 “인증까지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결국은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 출입명부를 기록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 경우, 음성으로 개인정보를 알려줘야 하기 때문에 시각장애인은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개인정보까지 무방비로 노출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코로나19 사태 속에서 시각장애인들의 이동 환경은 더욱 척박해지고 있다. 남정한 소장은 “코로나19 사태 후 시각장애인들의 외출은 크게 줄어들고 있는 추세”라며 “출입 명부 작성 어려움 외에도,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문제를 마주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코로나19 예방 차원에서 지하철, 대형 다중시설건물 등 엘리베이터에 부착되고 있는 항균필름도 시각장애인들에겐 골칫거리다. 실로암장애인자립생활센터는 지난 9월 항균필름으로 인한 촉지문제로 시각장애인 당사자들의 이동권과 정보접근접이 제한받고 있다며 대책을 촉구한 바 있다. ‘항균필름’으로 인해 버튼에 새겨진 점자를 인식하지 못하게 돼 장애인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 코로나 방역도 좋지만… “시각장애인 기본권 보장해야” 

하지만 정부는 이 같은 문제에 대해 명쾌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는 상황이다. 일부 시각장애인단체들이 ‘항균필름 점자 라벨 스티커’를 대안으로 거론하고 있지만 서울시 등 지자체는 아직까지도 대책 마련에 굼뜬 행보를 보이고 있다. 지난 9월 경기 부천 해밀도서관이 엘리베이터버튼에 붙일 수 있는 항균필름 점자 라벨 스티커를 만들어 배포한다는 소식만이 들려왔을 뿐이었다. 

또한 남 소장은 코로나19 예방 명목으로 시각 장애인들의 기본 인권이 무시되는 일도 일어나고 있다고 꼬집었다. 그는 “시각장애인들이 지하철에서 다른 노선 역으로 환승을 하고자 할 때, 이동지원 서비스를 요청할 수 있다”며 “미리 이 서비스를 요청하면 역무원이 직접 나와 보행에 도움을 준다. 그런데 최근 한 역사에서 직원이 시각장애인에게 막대기를 건네주며 한쪽 끝을 잡고 안내를 시도한 일이 있었다. 역사에선 코로나19 감염 예방을 위해 접촉을 줄이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지만 장애인들의 인권을 고려하지 못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남 소장은 센터가 자리한 봉천역에서 이와같은 일이 벌어졌다고 설명했다. 이에 그는 ‘물건 취급을 하는 것이냐”며 강하게 항의했고, 현재 봉천역에서 관련 행위를 시정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외에도 비대면문화가 확산되는 과정에서 시각장애인들의 마주하는 불편은 다양하다. 사람이 아닌, 기계로 주문을 하거나 결제를 하는 매장이 늘면서 시각장애인들은 일상생활에서 상당한 불편을 겪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비단 시각장애인 뿐 아니라, 고령자들도 함께 마주하고 있는 문제다. 

또 최근 비대면문화 속에서 각광을 받고 있는 자전거나 전동 킥보드 등 소형 전동 모빌리티 등도 장애인들에겐 위협요인이 되기 일쑤다. 특히 전통 킥보드는 횡단보도를 종횡무진하며 불쑥 등장하는 경우가 많아 시각장애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심지어 전동킥보드가 인도의 점자블록 위에 주차돼 시각장애인들의 보행 안전을 위협하기도 해 사회적인 문제로 부상했다. 

홍서준 연구원은 “시각장애인들에게 보행 환경은 안전과 직결되는 문제”라며 “점자블록이나 점자 표지판이 잘못 설치돼 있거나, 보도 상에 불특정한 장애물이 있다면 점자블록이나 점자표지판을 따라 걷는 시각장애인들은 크게 다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가뜩이나 시장애인들의 보행환경이 척박한 상황에서 코로나19로 장애인들의 이동권에 대한 배려가 사라지고 있는 점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했다. 

홍 연구원은 “시각장애인 편의시설 설치율은 증가세를 보이고 있지만 적정율 개선은 갈 길이 멀다”고 지적했다. 

◇ 시각장애인 편의시설 환경 여전히 척박 “부적정 설치 사례 개선해야”

홍서준 한국시장애인협회 연구원은 “시각장애인 편의시설 설치율을 높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설치 적정성을 점검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 게티이미지뱅크

최근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시각장애인편의시설지원센터가 서울시 남부도로사업소 보행환경을 모니터링한 결과에서도 이런 현실이 나타났다.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시각장애인편의시설지원센터는 올해 4월 23일부터 7월 7일까지 약 3개월간 서울시 남부도로사업소 관할 교차로 592개소 총 2,045개의 횡단보도 점자블록, 자동차진입 억제용 말뚝(이하 볼라드) 등을 현장 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점자블록의 경우 올바르게 설치된 것은 2,045개 중 341개인 16.7%에 불과했으며, 부적정하게 설치되거나 미설치된 곳이 80.1%로 나타났다. 

또 횡단보도에 설치된 볼라드의 경우 641개 중 올바르게 설치된 것은 단 41개인 6.4%에 그쳤다. 나머지 93.6%는 부적정하게 설치된 것으로 나타났다. 횡단보도에 장애물(횡단보도 폭 끝선을 기준으로 60cm 이내에 설치된 지주, 가로수 등의 시설물)이 있는 것이 554개인 27.1%이며, 음향신호기 버튼 전면에 점형블록은 216개인 10.6%만 설치돼 있었다. 볼라드 전면 점형블록은 227개인 35.4%만 설치된 것으로 조사돼 시각장애인의 보행환경에 어려움이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대해 시각장애인협회 관계자는 “볼라드는 부적정하게 설치된 경우, 보행에 큰 장애물이 된다”며 “시각 장애인 뿐 아니라 일반 보행자들도 다칠 수 있어 법적규격에 맞게 설치돼야 한다. 공공기관에서 설치하는 것은 그나마 법적 규격에 맞추고 있지만 민간에서 설치하는 볼라드는 부적합하게 설치되는 경우가 많다. 인식 개선이 필요한 부분인 것 같다”고 지적했다.  

홍서준 연구원은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에서 보행환경과 관련해서 주기적으로 모니터링을 통해 문제점을 발견, 지자체에 시정 요청을 하고 있지만 개선 속도가 더딘 상황“이라며 “여전히 편의시설 상당수는 설치가 부실하게 됐거나 관리가 안 된 사례가 많다. 점자가 잘못 새겨진 표시판이나 안내 표지판도 많아 시각장애인들이 불편을 겪고 있다. 설치율을 높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제대로 설치가 됐는지 점검하는 과정도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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