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종 한국국가전략연구원 북한연구센터장.
이영종 한국국가전략연구원 북한연구센터장.

설마 했는데 진심이었다. 적어도 청년지도자의 객기부리기 수준은 아니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들고 나온 동서해 연결 대운하 프로젝트 얘기다.

김정은 위원장은 지난 9월 8일 열린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동서해를 연결하는 운하를 건설하겠다고 선언했다. 한마디로 서해 남포하구~대동강 루트에서 시작해 강줄기를 이용한 운하를 건설해 동해 원산 인근 쪽으로 빠지게 하는 물길을 내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언급 내용은 같은 연설에서 나온 ‘핵 무력 법령화’에 묻혀 제대로 빛을 보지 못했다. 핵무기 버튼을 김정은 위원장에게만 부여하고, 그가 위험에 처할 경우엔 선제 핵공격도 가능하게 할 북한판 핵 교리에 온통 시선이 쏠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북한은 한 달여 만에 김정은 위원장의 동서해 연결 운하 건설이 본격화 할 것임을 알렸다. 10월 초 김정은 위원장이 “동서해 연결 운하를 반드시 건설하겠다”고 밝히면서 이를 김일성의 유훈(遺訓) 사업으로까지 제시했다는 게 노동신문 11월 20일 자 보도다.

김정은 위원장에게 있어 할아버지이자 선대 수령인 김일성(국가주석, 1994년 7월 사망)이 남긴 유지를 받드는 일은 권력의 정통성과도 맞닿아 있는 중대한 문제다. 운하건설을 유훈으로 제시하고 나선 게 간단치 않은 일임을 알 수 있다.

김정은 위원장은 “70년 전 수령님의 꿈을 기어이 현실로 만들어야 한다”면서 공사 추진에 의욕을 보였다. 노동신문도 “수령님께서 지녔던 이 원대한 뜻을 자신의 숭고한 이상으로 간직하시고 조국번영의 휘황한 설계도를 끝없이 펼쳐 가시는 경애하는 총비서 동지”라며 김정은 위원장을 찬양했다.

노동신문에 따르면 김일성은 6.25 전쟁 기간인 1952년 4월 12일 김일성대 교수·학생과 만나 동서해 연결 운하 건설문제를 연구·조사하라는 과업을 줬다고 한다. 김일성은 “운하를 건설한다면 대동강을 예성강이나 청천강과 연결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운하로 연결시킨다면 이 일대의 운수문제를 원만히 풀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분단으로 인해 북한의 동서 항구를 연결하는 게 쉽지 않고, 두 곳으로 나뉜 북한 해군 무력의 작전에도 큰 장애가 생기고 있기 때문이란 것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이런 사실을 거론하면서 “동서해를 연결하는 운하를 건설하는 것이 가지는 의의는 대단히 크다”고 강조한 것으로 북한 매체들은 전하고 있다. 김정은 위원장은 운하 건설에 대해 “전망적인 경제사업”(9.8 시정연설)이라고 강조한다.

운하가 건설되면 북한의 동서해 연결은 물론 다롄 등 중국 항만과 러시아 연해주 지역을 연결하는 경제적인 해상루트도 마련된다. 곧바로 태평양으로 나갈 수 있는 해로가 열리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 중국의 호응을 얻을 수 있고, 북한으로선 상당한 외화획득(통과비)을 기대할 수 있다.

이명박 정부 당시 추진하려던 한반도 대운하 건설 계획에 대해 “아무런 실용 가치도 없다”며 맹비난하던 북한이 급작스레 운하건설을 추진하겠다고 나선 건 이런 점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볼 수 있다.

북한은 아직 대운하와 관련한 통과 구간이나 구체적인 건설 계획 등은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고려시대 대표적 무역창구인 벽란도가 있는 예성강 하구부터 거슬러 올라가는 구간과, 남포 하구부터 대동강을 따라 상류지역에서 합류한 뒤 강원도 원산에서 동해안으로 빠져나가는 구간이 유력할 것으로 전문가들은 예상한다.

북한은 이미 운하건설을 염두에 둔 작업을 벌여놓고 있다는 게 대북 인프라 전문가인 안병민 한반도경제협력원장의 분석이다. 오랜 검토 끝에 서해의 남포 지역 대동강과 동해의 함흥 용흥강(금야강)을 연결하는 라인이 유력하게 떠올랐고, 12개의 계획된 갑문 중 서해 쪽 남포·미림·봉화·성천·순천 등 5개의 갑문 건설을 완성해 놓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동서해 연결 운하가 그리 만만한 사업은 아닐 것이라는 데 전문가 그룹은 입을 모으고 있다.

무엇보다 동고서저의 한반도 지형에서 동해안 쪽에 높게 솟은 낭림산맥을 넘는 수로 연결이 최대 난관이 될 것으로 보인다. 과거 이명박 정부의 한반도 운하 건설 추진 당시에도 이 문제가 난제로 떠올라 여러 개의 갑문을 계단식으로 만들어 해결하는 방법이 거론되기도 했다.

물론 김일성이 운하건설을 구상했던 시점과 지금은 70년의 시차가 있다. 그 사이 토목·건설 기술이나 인프라 관련 노하우는 눈에 띄게 발전한 게 사실이다. 첨단 기술과 막대한 자금을 집중적으로 쏟아 붓는다면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 있다.

문제는 북한이 처한 현실이다. 주민들의 식량 문제도 제대로 해결하기 어려운 경제난을 겪고 있고 대북제재로 인해 산업 전반이 엉망진창인 상황이다. 

핵과 미사일 개발에 올인함으로써 미국 본토 타격이 가능한 화성-17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지난 11월 18일 쏘아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 자금조차 북한 해커부대가 서방의 암호화폐 시장에서 탈취한 코인으로 마련해야 할 정도다.

북한이 동서해 연결 운하의 효율성이나 한반도와 주변국 경제·교역 등에 미칠 긍정적 파급효과를 제시하면서 국제사회의 협력과 투자를 요청한다면 검토해 볼만한 사업이다. 남북 협력 프로젝트로서도 가능하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김일성 유훈’ 운운하며 운하건설 프로젝트를 밀어붙이겠다는 건 과욕이자 망상에 가깝다. 핵과 미사일을 개발하듯 체제의 모든 역량을 투입해 매달린다면 어느 정도 사업 추진에 속도를 내는 모양새는 낼 수 있겠지만 결국 파국에 이를 것은 자명하다.

그 과정에서 얼마의 기간이 걸릴지도 모를 대역사에 동원될 군인과 건설노동자, 주민의 고통은 불을 보듯 뻔하다. 열악한 건설 인프라 속에 위험한 굴착과 발파작업이 주를 이루는 운하 건설의 특성상 상당한 사상자가 날 수밖에 없고, 강제동원과 인권유린 등의 문제가 발생하게 될 것이다.

남북한 통일이란 긴 여정에서 보면 문제는 더 심각하다. 경제성이나 이용효과, 환경과 생태의 파괴 문제 등에 대한 고려 없이 한반도의 허리를 물길로 분단시키는 운하가 지어지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김정은 위원장이 핵·미사일에 이어 또다시 무모한 운하건설 카드를 꺼낸 것에 대한 우려가 증폭하는 것도 이런 여러 이유에서다. 비핵화로 얻을 수 있는 여러 기회를 놓친 김정은 위원장이 이제 제 갈 길을 가겠다면서 내달음치고 있는 형국이다. 안타까운 건 핵을 거머쥔 채 한껏 근육질을 자랑하는 평양의 38살 청년 지도자를 말릴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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