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가 13일 오전 서울 용산구 삼각지역에서 장애인 권리예산 확보를 위한 지하철 출근길 선전전을 하고 있다. / 뉴시스
한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가 13일 오전 서울 용산구 삼각지역에서 장애인 권리예산 확보를 위한 지하철 출근길 선전전을 하고 있다. / 뉴시스

철도의 역사는 그 자체로 평등의 역사다. 19세기 유럽과 북미대륙에 깔린 철도는 인간 해방을 목표로 달리는 기술의 상징이었다. 기차는 귀족이라 할지라도 늦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았고, 남녀를 구분 짓거나 신분에 의해 좌석이 구분되지 않았다. 전통적 지위로 기차 안의 좌석이 나뉘지 않고 돈으로 자리가 구분된다는 것은 전통적인 신분 사회의 붕괴이자 새로운 사회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평등의 상징 그 자체였다.

한국의 지하철도 평등의 역사를 지녔다. 2001년 4호선 오이도역에서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추락 사망한 사고를 시작으로 그동안의 철도가 장애인에게 위험하고 차별적인 요소였음을 알리게 된 시작이었다. 타인의 도움 없이는 이용할 수 없어 자율성을 상실케하고, 매우 위험하고 매우 느린 휠체어 리프트는 그 자체로 자유롭지 못한 장애인의 삶을 담고 있었다. 추락 사고 발생 이후, 장애인 단체들은 지하철 역사 엘리베이터 설치를 요구했다. 정부와 지자체는 속속 모든 지하철역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겠다고 약속했다. 지하철의 엘리베이터 설치는 누구의 도움 없이, 안전하게 지하철을 이용할 수 있는 이동의 자유와 평등을 만드는 계기였다. 

그러나 2022년 12월 14일, 서울시와 서울교통공사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의 지하철 시위를 저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무정차 통과를 결정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는 필요에 따라 공권력이 장애인의 권리를 쉽게 빼앗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였다. 평등의 상징인 철도 위에서 공권력에 의해 너무나 쉽게 벌어진 차별과 배제다.

장애인은 수십 년을 기다려왔다. 안전하게 지하철을 타고, 교육을 받고 직업을 가질 수 있는 사회가 구현되기까지 사회의 구조적 차별과 억압 속에서 눈물과 절규로 그 시간을 버텨왔고, 때로는 시위와 저항으로 국민다운 삶을 살 수 있는 환경에 조금 더 가까워지기도 했다. 비록 그 과정이 어떤 이들의 눈에는 다소 거칠게 보였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이 모든 과정이 장애인 국민의 삶을 나아지게 하고, 대한민국이 선진국으로서 발전과 모범이 되는 계기를 만드는 길이라면 뚜벅뚜벅 가야하지 않을까.

전장연의 지하철 시위는 우리 사회에 많은 의미를 남겼다. 지하철이라는 장소에서의 시위가 낯설기도 했거니와 그동안 조명되지 않았던 장애인의 시위가 연일 뉴스 속보로 이어지기도 했다. 매체에 노출된 사회 문제를 두고 많은 사람들은 장애인의 삶과 지하철 시위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기 시작했다. 시위를 옹호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각자 저마다의 입장과 의견이 있듯이, 오늘은 필자의 입장과 의견을 피력해보고자 한다.

전장연 시위로 시민의 불편이 초래되었으니 시위를 못 하도록 지하철 무정차 통과 결정은 어쩔 수 없는 조치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불편 해소에 더 무게를 두고 차별과 배제를 감행하겠다는 것이 ‘어쩔 수 없는’이라는 말로 함축되었다. 이는 결코 정당한 사유도, 타당한 사유도 될 수 없다. 이런 논리라면 이동·학습·일자리·주거공간에서 수십 년 동안 그리고 지금도 불편을 겪고 있는 장애인에 대한 ‘어쩔 수 없는 조치’가 우선 마련되어야 한다. 배제와 억압을 정당화하기 위한 조치는 문제 해결 방법이 아니다. 그것은 장애인 차별이고 혐오다.

어떤 사람들은 장애인 이동권 이슈가 아닌 사안을 가지고 왜 지하철에서 시위를 벌이느냐고 한다. 길 위에서 이뤄지는 모든 종류의 시위는 교통과 관련된 것만은 아니다. 노동 처우 문제 개선, 기후위기 대응과 같은 환경 문제 해결, 비리를 저질렀던 대통령을 탄핵하는 문제까지 모든 문제의 개선 요구는 그저 길 위에서 이뤄졌다. 철도는 그저 그런 길 중 하나이며, 철도 위에서 시위가 꼭 이동권 문제만을 다뤄야 한다는 논리 또한 ‘약자다움’, ‘장애인다움’을 요구하는 차별적 인식의 말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왜 하필 출근 시간에 지하철 시위를 하냐며, 전장연의 시위 방식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과거를 돌이켜보면 모든 시위는 길과 공간을 점거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어왔다. 광우병 퇴진 집회나 촛불집회도 누군가가 이동해야하는 길과 광장을 점거했다. 매년 한 두차례씩 벌어지는 대규모 노동조합의 집회 역시 길 위에서 벌어진다. 시위의 속성이 원래 그런 것이다. 자신들이 마주한 문제나 불합리한 사회적 문제를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전파할 수 있는 시간과 장소를 찾는 것은 시위의 당연한 속성이다. 만약 전장연이 막차 시간대에 시위를 했다면, 장애인이 당면한 문제에 아무도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출근길 불편과 다른사람에게 피해를 주면서 진행되는 시위는 옳지 못하다는 의견이 여전히 남아있다. 결과적으로 누군가에게 불편이나 피해가 발생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전장연의 지하철 시위를 보면, ‘불편하게 해서 죄송합니다’라며 시민들에게 먼저 사과를 한다. 타인을 불편하게 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과와 양해를 구하고 함께 의지할 수 있는 관용도 필요하다. 반대로 비장애인 중심의 사회 환경 속에서 평생을 불편하게 살아가는 장애인에게 ‘불편하게 해서 죄송하다’라고 말해주는 책임있는 목소리는 아직 들리지 않는다.

홍서윤 한국장애인관광협회 비상임이사
홍서윤 한국장애인관광협회 비상임이사

전장연 시위의 본질은 간단하다. 장애인도 평범한 국민으로 살 수 있도록 주권을 보장해달라는 것이다. 보편적 복지와 평등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한 요구가 아니다. ‘그럴 수 있는 환경이 못되서’, ‘예산이 부족해서’라는 말은 핑계다. 장애인은 늘상 부당한 사유를 감내하며 기다려왔다. 어떤 일을 시작하거나 제도를 설계하는 단계에서부터 장애와 비장애를 같이 고려했다면 추운 겨울 장애인들이 이른 아침부터 지하철 시위 벌이는 일도 대한민국의 불평등도 지금보다는 줄어들 것이다. 

인류사에서 철도는 평등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지난 14일을 기점으로 대한민국에서 철도는 그 의미가 완전히 퇴색되었다. 공권력에 의한 배제와 차별이 허용되는 길이 만들어진 것이다. ‘지하철 무정차 통과’ 결정은 결국 서울시와 서울교통공사가 시민을 방패 삼아 본질을 흐리며 상황만을 무마하려는, 부당하고 차별적인 행위라고 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일상 속에서 무수한 차별을 경험한 장애인들은 14일의 결정이 추후 어떤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직감한다. 그날의 결정은 대한민국의 내일이 어제보다 못한 후진적인 사회로 다시금 경로 이탈할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안타깝고 비참하다.
 

홍서윤 한국장애인관광협회 비상임이사 프로필 

 

현) 한국장애인관광협회 비상임이사

현) 장애인문화예술원 비상임이사 

전) 한국방송공사 앵커 

전) 장애인여행문화연구소 대표 

전) 한국장애인관광협회 대표이사 

전) 한국교통안전공단 비상임이사 

전) 서울관광재단 비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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