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종 한국국가전략연구원 북한연구센터장​​​​​​​북한학 박사
이영종 한국국가전략연구원 북한연구센터장
북한학 박사

평양에서는 지난해 말 화보집 하나가 발간됐다. 국가주석이던 김일성(1994년 7월 사망)의 출생 110주년을 기념해 북한과 러시아의 친선 관계를 부각·선전하는 내용이다.

맨 앞장에는 북한 정권 수립 이듬해인 1949년 2월 하순 모스크바를 방문한 김일성 수상이 체류 일정을 소화하다 3월 5일 이시오프 스탈린 소련 장관회의 주석(총리)을 만난 사진이 담겼다. 최초의 북러 간 정상회담이다.

당시 김일성의 나이가 37세로 지금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나이(올해 39세)와 비슷하다는 점, 김정은 위원장이 화보 속 김일성의 스타일과 같은 코트와 모자를 쓴 적이 있다는 사실 등에 비춰보면 김정은 위원장 리더십 강화에 할아버지 김일성의 카리스마를 활용하려는 이미지 전략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하지만 북한의 더 깊은 속내는 북러 간의 친선관계가 이처럼 오래되고 김일성-스탈린 시절부터 대를 이어 내려오는 전통적인 혈맹이란 점을 부각하는데 있는 듯하다. 당시 스탈린의 비호 아래 김일성이 6.25 남침의 구상을 구체화 했다는 점에서 북러 관계가 각별하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사실 북러 관계의 기원은 1949년 김일성-스탈린 회동을 훨씬 거슬러 올라가야 맞다. 항일투쟁을 했다고 주장하는 김일성이 실제로는 소련군 대위로 복무했으며, 일제로부터 해방이 된 이후 한반도 북부 지역에 주둔하기 위해 온 소련군을 따라 귀국했기 때문이다.

물론 북한은 이런 사실은 물론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소련군 브야츠크 병영에서 태어났다는 사실도 숨긴다. 주민들에게 김정일이 백두산에서 태어났다고 날조·선전하면서 ‘백두혈통’ 운운하는 게 거짓임이 드러난다면 김씨 세습 정권이 뿌리부터 휘청거릴 수 있다.

북한은 한때 러시아를 향해 거친 비난을 쏟아낸 적이 있다. 소련 체제가 붕괴하고 러시아에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바람이 일었을 때다. ‘사회주의 배신자’ 운운하면서 러시아를 몰아세웠다.

하지만 푸틴 체제의 러시아에 대해 북한은 끊임없이 러브콜을 보내왔다. 적절한 대북지원을 확보하는 건 물론이고 미국 주도의 서방 대북제재 압박에서 중국과 함께 러시아가 든든한 방파제 역할을 해줄 것이란 기대에서다.

지난 1월 27일,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은 담화를 냈다. 우크라이나 침공과 관련해 노골적으로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편을 드는 내용이다.

그는 “제국주의 연합세력이 아무리 발악하여도 높은 애국심과 완강성, 강의한 정신력을 지닌 러시아 군대와 인민의 영웅적 기개를 절대로 꺾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러시아 군대와 인민과 언제나 한 전호에 서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여정 부부장이 발끈한 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미국의 첨단 전차 M1 에이브럼스 31대를 우크라이나에 지원할 것이라고 공식 발표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북러 간 무기밀매에 대한 의혹이 짙어진 상황에서 비난 여론이 쏠리자 북한의 입장을 어떤 식으로든 표출해야겠다는 생각이 깔린 담화로 보인다.

김여정 부부장의 담화를 꼼꼼히 짚어보면 북한 체제를 이끌고 있는 김정은 위원장과 김여정 부부장 남매에 대해 안쓰러운 생각까지 든다. 세계를 바라보는 그들의 안목이 더없이 편협하고 눈앞의 이해관계에만 집착하는 양상을 보인다는 점에서다.

북핵과 미사일 도발로 사면초가 신세가 된 김정은 체제로 봐서는 대북제재에 거부권 행사로 차단막을 쳐주는 푸틴과 시진핑이 고마울 수 있다. 식량과 코로나 백신 등을 지원해 급한 불을 끄게 해주고, 무기밀매와 북한 노동자의 우크라이나 친러 지역 전후 복구 투입으로 짭짤한 달러벌이도 하게 해준다.

하지만 국제사회는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일제히 규탄의 목소리를 내고 있고, 이를 응징하기 위한 대응에 머리를 맞대고 있다. 시진핑 체제의 중국도 이런 분위기를 간파하고 신중모드로 가고 있는 모습니다. 푸틴과 러시아 지도부도 이런 상황에 당혹해하며 출구 마련에 고심하는 듯하다.

그런데 김여정 부부장은 한 체제의 공식 입장이라 할 수 있는 담화 형식을 통해 무작정 러시아를 편들고 미국과 서방세계의 평화 수호 노력에 푸념을 퍼붓고 있다. 

김정은 체제의 북한은 집권 이후 핵·미사일 도발에 올인하면서 국제사회로부터 완전히 고립된 신세가 됐다. 대북제재 속에서 경제와 내치는 만신창이가 된지 오래다. 주민에 대한 선전·선동과 화려하게 장식된 쇼윈도 같은 평양의 몇몇 선전물로 겨우 체면치레를 하는 수준이다.

“미국만 아니라면 세계는 지금보다 더 밝고 안전하고 평온한 세상이 될 것”이란 비뚤어진 대미관과 세계인식으로 어떻게 한 체제를 이끌어가고, 2,500만 주민의 삶을 책임지겠다는 것인지 불안하다. 환골탈태나 대오각성을 주문하기에는 평양 MZ세대인 김정은-김여정 남매의 뒤틀어진 세계관과 객기가 이미 도를 넘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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