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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씨네
[인터뷰] 이정은의 이유 있는 전성기
2019. 12. 05 by 이영실 기자 swyeong1204@sisaweek.com
데뷔 이래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이정은. /김경희 기자
데뷔 이래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이정은. /사진=김경희 기자

시사위크=이영실 기자  연기 인생 28년 만에 드디어 만난 전성기다. 브라운관과 스크린을 넘나들며 종횡무진 활약하고 있고, 유수의 영화제에서 여우조연상을 휩쓸며 진가를 인정받았다. 코미디면 코미디, 스릴러면 스릴러, 가슴을 울리는 휴먼 드라마까지. 다양한 장르를 소화하는 능력도 흠잡을 데 없다. 데뷔 이래 가장 뜨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배우 이정은의 이야기다.

이정은은 오랜 무명 생활 끝에 뒤늦게 빛을 본 스타다. 1991년 연극 ‘한여름 밤의 꿈’으로 데뷔한 그는 2013년 종합편성채널 JTBC ‘시트콩 로얄빌라’와 영화 ‘전국노래자랑’을 통해 매체로 활동 반경을 넓혔다. 이후 다수의 작품을 통해 단역, 조연을 가리지 않고 차근차근 필모그래피를 쌓아왔다.

그리고 비로소 최고의 전성기가 찾아왔다. 올해 종합편생채널 JTBC ‘눈이 부시게’를 시작으로 케이블채널 OCN ‘타인은 지옥이다’, KBS 2TV ‘동백꽃 필 무렵’ 등과 영화 ‘미성년’ ‘기생충’ 등을 통해 대중과 만난 이정은은 독보적인 존재감으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대세’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기생충’(감독 봉준호)과 ‘동백꽃 필 무렵’(연출 차영훈, 극본 임상춘) 속 활약이 눈에 띈다.

먼저 한국 영화 역사상 처음으로 제72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기생충’에서 박 사장(이선균 분)네 입주 가사도우미 문광 역을 소화한 이정은은 폭발적인 에너지를 뿜어내며 관객들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코미디부터 스릴러까지 아우르는 연기로 압도적인 존재감을 뽐낸다. 해당 작품으로 제20회 춘사영화제, 제28회 부일영화상, 제40회 청룡영화상 여우조연상 트로피를 거머쥐기도 했다.

대세 배우로 자리매김한 이정은. /김경희 기자
대세 배우로 자리매김한 이정은. /사진=김경희 기자

최근 인기리에 종영한 ‘동백꽃 필 무렵’도 빼놓을 수 없다. 딸 동백(공효진 분)을 버린 엄마 정숙으로 분해 12회부터 첫 등장했던 이정은은 실감 나는 치매 연기부터 능청스러운 코믹 연기, 긴장감을 자아내는 카리스마까지 폭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자랑했다. 절절한 모성애 연기는 두말할 것 없었다. 오랜 시간 갈고닦은 내공을 제대로 터트린 이정은이다.

지난 4일 <시사위크>와 만난 이정은은 “좋은 일이 너무 많았다”면서 “별일이다”라며 웃었다. 

-올해가 큰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저희 어머니가 내가 올해 삼재(三災)에 들었는데 호(好) 삼재라고 하더라. 나쁜 삼재가 아니니까 성실히 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고 말씀하셨다. 봉준호 감독도 나와 동갑이니 같이 좋은 일이 생긴 게 아닌가 생각도 들었다. 어떤 한 작품이 물꼬가 트면 찾아주는 분들이 많이 생기더라. 좋은 작품을 써주고 있는 작가나 감독님이 찾아준 결과가 아닐까.”

-계속해서 좋은 결과를 얻고 있는데, 주변 반응은 어떤가.
“이선균이 제일 많이 얘기했다. ‘우주의 기운이 누나(이정은)한테 쏟아지고 있다’고. 하하. 그 말대로 올해는 여러 가지로 주목을 많이 받았다. 이준익 감독이 ‘운이 좋은 사람보다 운이 좋은 사람을 알아보는 눈을 가진 사람이 더 운이 좋은 거다’라고 말을 하더라. 나는 그런 운이 좋은 사람들 옆에 붙어있었던 게 아닌가. 운이라는 건 사실 그만한 노력이 필요한 건데, 그 노력을 하는 분들이 포진돼 있는 프로덕션에 내가 들어갔던 것 같다.”

-본인이 준비된 상황이니 그 운을 잡을 수 있었던 것 아닌가.
“그런 말이 또 나오긴 한다. 하하. 불러주면 책임감이 생기잖나. 어떤 사람이 어떤 길을 갈 때 느끼는 책임감은 부담만 있는 게 아니고 실현해보고 싶은 욕구도 만든다. 저도 좋은 작가나 감독이 불러줬을 때 해내기 위해서 열심히 농사를 지은 거다.”

-‘동백꽃 필 무렵’이 인기리에 종영했다. 기분이 어떤가.
“정말 필력이 대단한 작가님 작품을 했다. 경제적인 이유로 자신의 가족을 고아원에 맡겨야 했던 여성, 소외된 사람들의 얘기를 심도 있게 다룬 드라마면서, 대중적인 사랑을 받은 작품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영광이다. 또 공효진이라는 배우를 너무 좋아했는데, 그와  좋은 ‘케미’를 만들 수 있어서 감사하고 참 좋았던 기회였다.”

‘동백꽃 필 무렵’에서 절절한 모성애 연기를 펼친 이정은 스틸컷. /팬엔터테인먼트
‘동백꽃 필 무렵’에서 절절한 모성애 연기를 펼친 이정은 스틸컷. /팬엔터테인먼트

-정숙도 시청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착한 사람이 계속 착하면 그냥 착한 걸로 남는데, 정숙은 여러 추측이나 의심이 있었다. 반전이 될 때 더 많은 관심과 애정이 오는 것 같다. 정숙의 한방이 뭘까,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 걸까, 살인자나 보험 사기 아닌가 다양한 의심이 있었다.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오해가 풀리는 순간이 어떨까 했는데, 역시 작가의 대단한 계획이었던 게 아니었나 생각한다. 너 계획이 다 있었구나.(웃음) 드라마를 보고 엄마한테 전화를 많이 했다고 하더라. 그런 마음이 생길 수 있게 만들었다는 게 정말 대단한 일이 아니겠나.”

-실제 비혼인데, 어떻게 그렇게 엄마의 마음을 잘 표현해내나.
“주위가 다 재료니까. 주변이 다 엄마다. 경험은 안 해봤지만, 보고 들은 걸로 할 수 있었다. 중요한 토대는 연극할 때 할머니 역을 많이 했다. 그때 작가들과 작품이 줬던 영감이 오늘을 만든 것 같다. 또 다른 게 축적되면 다른 게 표현될 거다. 그렇게 생각하면, 버릴 시간이 없다. 우리 어머니는 본인이 모태가 됐다고 생각하신다. 굉장히 즐거워하신다. 하하.”

-영화 ‘기생충’ 문광에 이어 ‘동백꽃 필 무렵’ 정숙도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자아내면서 긴장감을 유지하는 역할도 해내야 했다.
“‘기생충’ 개봉 전에 ‘동백꽃 필 무렵’ 캐스팅이 됐다. 시기적으로 묘하게 맞물린 지점이 있었다. 그래서 미스터리한 느낌이 ‘기생충’ 덕에 얻어진 부분도 있다. 한 번은 카메라 감독님이 ‘이건 좀 기생충 같은데?’라고 하시더니 좋다고 찍어주시더라. 부각시켜준 것도 있다. 카메라 각을 밑에서 잡아서 더 그로테스크하게 보이게 한 부분도 있었다. ‘기생충’ 이미지 덕을 좀 봤다.”

이정은이 공효진을 향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사진=김경희 기자
이정은이 공효진을 향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사진=김경희 기자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면.
“‘덤으로 7년 3개월 적금 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고 말하는 장면이나 필구 친구들한테 다가가서 ‘57세 할머니가 있다’고 하는 ‘비광’신 정말 좋아한다. 대사가 너무 자연스럽게 나왔다. 어떻게 작가가 할머니의 마음까지 이해하는지. 연기할 때 그렇게 편안할 수 없었다. 말을 정말 잘 골라 썼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사가) 작위적이지 않고 읽으면 읽을수록 일상적이었다. 그런데 또 정말 필요한 말을 골라냈더라. 공효진도 작가님 글이 너무 좋다고 노래 부르듯 얘기했다.”

-공효진과 호흡은 어땠나. 
“원래 좋아했던 배우다. 연기 스타일도 너무 좋다. 매체에서는 내가 후배지 않나. 많은 사랑을 받았던 친구와 연기를 하면서 도움을 많이 받았다. 어떤 장면에 대해 스스럼없이 서로 얘기할 수 있었던 게 좋았다. 또 (공효진이) 연기를 하면 대사라고 느껴지는 게 아니고 나한테 말을 하는 것 같으니까 더 편하게 할 수 있었다. (공효진의 연기가) 정말 물 흐르듯  자연스럽지 않나?”

-필구를 연기한 김강훈은 어땠나. 
“천재적이다. 강훈 군이 대가족이더라. 사랑도 많이 받고 자랐다. 엄마, 아빠에 대한 개념, 부재에 대해 깊은 성찰을 하더라. 정말 놀랐다. ‘미스터 션샤인’에서 봤을 때부터 특별한 재능이 있는 친구라고 생각했다. 나보다 더 큰 감동을 줬다. 눈을 보고 있으면 감동스럽잖나. 요즘 아역 배우들은 그냥 배우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기생충’에서 다송을 연기한 정현준 군도 그렇고 정말 천재적인 것 같다. 다만 그 재능이 어렸을 때만 쓰이는 게 아니라 성장하면서 파워도 커져서 세계적인 배우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본인은 노력이 더 큰가, 재능이 더 큰가.
“아무리 많은 재능이 있더라도 쭈뼛쭈뼛하는 시기가 있는 것 같다. 나도 어렸을 때 재능이  있었다. 애들한테 대본 나눠주고, 연기하고 그런 걸 좋아했다. 나가서 춤추고, 어른들 앞에서 재롱부리면 먹을 것도 생기니까. 하하. 그런데 잊고 살았다. 성인 돼서 카메라 울렁증도 있었고 여러 어려움이 있었는데, 어떤 순간 당당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되더라. 누군가의 칭찬 때문일 수도 있고, 작품 덕일 수도 있다. 나는 그 시기가 늦게 왔다. 어렸을 때 재능이 있었겠지만, 그걸 계발하는데 분명히 노력도 있었다. 어떤 분이 ‘이정은이 연기를 잘하는 것은 단역부터 차근차근해왔던 모든 것들이 쌓여있고, 토대가 만들어진 것이다’고 하더라. 그 말이 가장 와닿았다. 분명히 쌓여있고, 나는 그런 배우라고 생각한다.”

보여줄 게 더 많이 남은 배우 이정은. /사진=김경희 기자
보여줄 게 더 많이 남은 배우 이정은. /사진=김경희 기자

-이정은을 보며 꿈을 키우는 후배들도 많이 있다. 평소 조언도 해주나.
“그렇다고 하더라. 그냥 술 많이 사준다. 하하. ‘작품 할 때 너만 생각하지 말고 옆에도 생각해라, 작품을 볼 때 네 역만 보지 말고 큰 걸 봐라’라는 얘기를 하긴 했다. ‘좋은 사람이 아니어도 연기를 잘하면 된다’는 말이 있는데, 맞는 말일 수도 있다. 인간됨만 표현하는 게 아니라 본능적으로 표현해야 할 때도 있으니까.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천재과에 속한다면 나머지는 노력이다. 노력은 인간 사회에서 해야 하는 일이다. 노력에 운이 따르려면 관계가 중요하고 그러려면 남을 배려하는 능력도 필요하고, 조화를 이룰 수 있어야 한다. 기량을 펼치지 못한 후배들이 볼 때 나를 멘토로 생각해주는 것 같다. 그리고 재밌잖나. 이제 100세 시대가 됐는데, 50세가 다 돼서 주목을 받고 하니까 너무 늦은 게 아닐 수 있다는 위로를 주나보다. 청룡영화상 수상 이후에도 후배들에게 많은 축하 메시지를 받았다.”

-이정은의 시대가 왔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 어떤가. 또 앞으로 이루고 싶은 바람이나 목표가 있다면.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성실하게 작품을 계속할 거다. 행복할 때 불행을 생각하면, 마음의 평정이 오니까 그런 상태에서 작업을 하고 싶다. 지금까지 온 것처럼 계속 갈 수 있는 배우면 좋겠는데, 이런 특수를 계속 누릴 순 없을 것 같다. 아마 내년에는 다른 후배의 이름이 거론되는 시대가 올 거다. 잘 자리를 내주는 건강한 선배가 되고 싶다. 나도 주목하고 있는 후배들이 있다. 그들이 수면 위로 올라오는 걸 바라보면서 부러울 때도 있지만, 고두심·김혜자 선생님처럼 그들을 초연하게 볼 수 있는 선배가 되고 싶다. 가끔 다시 돌아가고 싶은 시점이 있냐는 질문을 받는다. 그런데 난 가고 싶은 순간이 없다. 지금까지 잘 왔다고 생각한다. 정말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