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말의 사랑’(감독 임선애)으로 관객 앞에 서는 임선우. / 엔케이컨텐츠
‘세기말의 사랑’(감독 임선애)으로 관객 앞에 서는 임선우. / 엔케이컨텐츠

시사위크=이영실 기자  배우 임선우는 김종관 감독의 ‘더 테이블’(2017)로 데뷔한 뒤 영화 ‘허스토리’ ‘뺑반’ ‘침입자’ ‘연애 빠진 로맨스’ 등과 드라마 ‘트레이서’ ‘미씽: 그들이 있었다 2’ 등 다양한 작품에 출연하며 차근차근 필모그래피를 쌓았다. 

2021년 단편영화 ‘퇴직금’으로 제47회 서울독립영화제 독립스타상을 수상하며 탄탄한 실력을 인정받았고, 지난해 7월 ‘비밀의 언덕’에서 사회 초년의 초등학교 교사 애란 역으로 깊은 인상을 남기며 한국 독립영화계가 사랑하는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오늘(24일) 개봉한 ‘세기말의 사랑’(감독 임선애)에서도 임선우의 진가를 확인할 수 있다. ‘세기말의 사랑’은 세상 끝나는 줄 알았던 1999년, 짝사랑 때문에 모든 걸 잃은 영미(이유영 분)에게 짝사랑 상대의 아내 유진(임선우 분)이 나타나며 벌어지는 이상하고 사랑스러운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데뷔작 ‘69세’로 유수의 영화제를 휩쓸며 한국 영화계가 주목하는 여성 감독으로 떠오른 임선애 감독의 차기작으로,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파노라마 섹션을 통해 첫선을 보인 데 이어 제49회 서울독립영화제 페스티벌 초이스 부문에 초청돼 관객의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극 중 임선우는 근육병을 앓고 있지만 꼿꼿하고 당당한 태도를 지닌 유진을 연기했다. 유진은 새천년이 오던 날 남편은 감옥에 가게 되고 애정 문제와 채무 관계로 얽힌 영미와 가까워지게 되는 인물로, 첫인상은 까칠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사연 많은 입체적인 캐릭터다. 

임선우는 촬영 후 재활을 거쳐야 했을 만큼 남다른 노력을 기울이며 신체 움직임이 제한된 인물의 감정을 오직 표정과 언어만으로 완벽 표현한 것은 물론, 겉으로 보이는 장애보다 그 누구보다 뜨거운 유진의 내면에 초점을 맞춰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인물로 정성스럽게 빚어냈다. 

임선우가 ‘세기말의 사랑’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전했다. / 엔케이컨텐츠
임선우가 ‘세기말의 사랑’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전했다. / 엔케이컨텐츠

최근 <시사위크>와 만난 임선우는 개봉 소감부터 캐릭터 구축 과정, 촬영 비하인드 등 ‘세기말의 사랑’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전했다. 특히 “무엇을 예상하든 다른 걸 경험하게 될 것“이라며 자신감을 드러내 눈길을 끌었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첫 공개된 뒤 극장 개봉까지 앞두고 있다. 기분이 어떤가. 

“오히려 마음이 덤덤하다. 나 스스로 평가하기 바빴는데 개봉하면 온전히 관객들에게 넘어가는 것이니까 이제는 덤덤하게 관객이 어떻게 보실지 기다리는 마음이다. 유진이라는 역할을 할 때는 몰랐는데 하고 나서 보니 굉장히 큰 역할이더라. 비중의 문제가 아니고 역할 자체가 컸다. 많은 걸 쏟아부었어야 했고 실제로도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던져서 이 역할을 했다. 어떻게 봐주실지는 내 몫이 아닌 것 같다.”

-근육병을 앓고 있는 캐릭터였다. 신체적으로 불편한 인물을 표현하는 것에 대한 부담도 있고 고민도 많았을 것 같다. 

“처음 만났을 때는 장애가 크게 다가오긴 했다. 장애를 가진 인물을 처음 연기 해보기도 했고. 그런데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유진의 안에 굉장히 많은 무언가가 있다고 느꼈다. 굉장히 뜨거웠다. 그것을 표현하는 게 더 큰 과제로 다가왔다. 이 여자의 뜨거운 피, 그런 감정들. 아마 이렇게 큰 역할인 줄 알았으면 무서워서 못했을 거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몰라서 할 수 있었다. 촬영 한 달 전에 시나리오를 받았다. 하기로 하고 난 후 계산하고 그럴 여유가 없었다. 뛰어 들어가서 감독님 붙잡고 그냥 진흙탕에 구르면서 정신없이 했다.”

-실제 모델이 된 인물을 만나기도 했다고. 캐릭터를 구축하는 데 어떤 영향을 줬나.

“만나러 가기 전에는 이것도 물어보고 저것도 물어봐야지 했는데 막상 실제로 그분을 만나보니 그냥 한 사람이었다. 질문들이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분이 살아온 삶에 대해 들었다. 그런 장애를 가지고 살면 무엇이 힘든지 등. 영화에서 유진이 모기를 무서워하는데 간지러운데 긁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지점들을 굉장히 덤덤하게 이야기하더라. 장애, 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에 대해 어떤 연민이나 동정을 갖는 것도 편견이라는 걸 느끼게 됐다. 정작 당사자는 삶의 일부고 덤덤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들인데 너무 크게 생각한 게 아닐까. 그런 점들을 깨달으면서 유진이라는 인물의 태도를 생각하는 데 도움이 됐다.” 

인물의 태도에 집중했다는 임선우. / 엔케이컨텐츠
인물의 태도에 집중했다는 임선우. / 엔케이컨텐츠

-촬영 후 재활을 했을 정도로 신체적으로도 무리가 왔다고.

“촬영한 기간만큼 재활했다. 신체가 유진과 다르잖나. 옆에서 영미가 말을 하면 나도 모르게 고개가 자꾸 움직이고 화를 낼 때나 울 때도 몸이 들썩이는 거다. 몸이 다 연결돼 있으니까. 억지로 움직이지 못하게 힘을 주고 있다 보니 촬영 중반부터는 목이 아예 안 돌아갔다. 연기할 때는 도움이 됐는데 몸에는 무리가 됐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나 자신을 묶어놓고 연기한 것은 처음이었고 이렇게라도 해서 그 인물을 느끼고 살아볼 수 있어서 배우로서는 참 소중한 경험이었다.” 

-유진을 연기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품은 키워드나 이미지가 있다면.

“유진의 태도다. 이 여자는 쓸데없이 주눅 드는 인물이 아니다. 사회에서 소외돼 있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연민을 갖고 사는 사람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말할 때도 부탁하는 여자는 아닌 거다. 당당하게 말하는 여자다. 누군가 부당하게 대한다고 생각하면 화를 낼 줄 아는 꼿꼿한 유진의 태도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런 유진의 태도가 가장 잘 드러나는 장면이 첫 등장 신이었다. 어떤 고민을 했나.

“중요했다. 어쨌든 남편을 좋아하는, 어떤 관계가 있는 여자를 찾아가는 건데 유진은 찾아갈 줄 아는 여자인 거다. 찾아가지 않는 여자도 아니고 몰래 숨어서 보는 여자도 아니고 풀메이크업을 하고 꼿꼿한 느낌으로 찾아가 존재를 드러낼 줄 아는 사람. 처음 등장하는 장면에서 그런 유진의 태도가 보여야 한다고 생각해서 외적인 모습도 신경을 썼다. 중요한 신이었다.”

‘세기말의 사랑’으로 호흡을 맞춘 노재원(왼쪽)과 임선우. / 엔케이컨텐츠
‘세기말의 사랑’으로 호흡을 맞춘 노재원(왼쪽)과 임선우. / 엔케이컨텐츠

-도영(노재원 분)을 향한 유진의 마음은 어떻게 해석했나. 

“기본적으로 사랑인데 영화를 찍으면서 도대체 이들이 하는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 생각을 많이 했다. 남녀 간의 사랑인데 그것만으로 보이지 않았거든. 더 넓은 사랑이었던 것 같다. 유진도 그렇고 도영도 그렇고 사회에서 무시당하는 사람이다. 주류가 아니고 소외된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들인데 그 존재에 대한 사랑이었던 것 같다. 받으려고 하는 사랑은 아니었다.” 

-노재원과 어떤 이야기를 나눴나.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 한 것은 아닌데 촬영하면서 자신이 느낀 것들을 조금씩 나누면서 했다. 소풍 장면이 처음 호흡을 맞춘 신이다. 사랑에 빠지는 신인데 처음 만나서 찍어야 하니 걱정도 됐다. 그런데 막상 만나니 되게 오래 알고 지낸 사람 같은 거다. 말을 하지 않아도 호흡이 자연스럽게 잘 맞았다. 주고받는 말들도 연기한다는 느낌보다 자연스러운 흐름 안에서 나왔다.”

-이유영과의 호흡은 어땠나. 

“처음 호흡부터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영미가 빨간 머리를 하고 유진의 집으로 찾아오는 신이 거의 처음 호흡을 주고받는 장면이었는데 고개를 돌릴 수 없어 볼 수 없어도 다 전해졌고 그것을 받아 나 역시 줄 수 있었다. 첫 호흡부터 이 배우와 무엇을 만들어가게 될지 궁금하고 기대가 된다는 생각을 했다.” 

임선우가 임선애 감독의 현장을 떠올렸다. / 엔케이컨텐츠
임선우가 임선애 감독의 현장을 떠올렸다. / 엔케이컨텐츠

-임선애 감독은 어떤 감독이었나. 

“되게 집요하다. 자신이 원하는 그림이 있고 그것을 구현하기 위해 끝까지 노력한다. 그런 감독님의 태도에서 많은 걸 배웠다. 이 현장이 좋았던 것 중 하나가 뭐가 더 좋을지 생각해 보는 시간이 더 있었다는 거다. 더 좋은 것을 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다. 감독님뿐 아니라 모든 제작진이 이 정도면 됐다가 아니고 여기서 어떻게 더해야 잘 전달될까 계속 고민하고 시도했다. 그런 것들이 굉장히 인상 깊었다. 스태프들도 행복하다고 했다. 이 작품을 해서 너무 행복하다고. 비록 몸은 힘들지만.(웃음) 적당히 정답을 찾아가는 게 아니라 더 좋은 것을 찾아내기 위해 맨땅에 헤딩하듯 시도하는 즐거움이 있는 현장이었다.”

-유진을 통해 채워진 부분이 있다면.  

“배운 것은 있다. 삶에 대해, 생에 대해 의지를 가진 인물이었다. 사람이 힘들 때 나약한 생각을 할 때도 있고 그렇잖나. 그런데 유진은 죽을 때 죽더라도 끝까지 먹을 밥 다 먹고 부릴 호구도 다 부리고 살 것 같은 거다. 어느 날 숨이 막혀 죽더라도. 그 태도가 멋지다고 생각했다. 끝까지 자기의 삶을 완주하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생각하게 했다.”

-이 영화의 힘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우선 예상이 안 되는 지점이 있다. 이런 영화일 것 같다고 하고 봤는데 뭔가 다른 게 있다. 무엇을 예상하고 오든 다른 걸 경험하고 갈 거다. 또 세기말 그 시대가 느껴지고 당시를 살아갔던 인물이 생생하게 보였다.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공기가 느껴지는 영화를 만나는 게 드문데 이 영화는 그런 영화다. 인물들이 그 안에서 생생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관객에게도 전해질 거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계획은. 

“아직은 못해본 게 많아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겁 없이 선택해서 해보고 싶은 마음이다. 겸손한 마음으로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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