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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을 말하다
[한국 성소수자 인권 '12점'④] 서울 퀴어문화축제서 만난 사람들
2018. 07. 25 by 현우진 기자 hwjin0216@naver.com
지난 14일 시청광장에서 19번째 서울퀴어문화축제가 열렸다. <시사위크>

[시사위크=현우진 기자] 서울에서 19번째 퀴어문화축제가 열린 14일, 시청 앞 서울광장은 형형색색의 머리색을 하고 옷을 입은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이날 서울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가 추산한 참가자 수는 약 12만명(부스행사 4만5,000명).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하루의 자유를 얻은 12만명의 성소수자들은 함께 LGBT 깃발 아래서 사진을 찍고, 아티스트 쿠시아 디아멍의 노래에 열광하고, 무지개 망토를 두른 채 성적 지향의 자유를 외치며 도심을 행진했다.

커밍아웃한 자녀를 둔 부모들의 모임 ‘성소수자 부모모임’. <시사위크>

기자가 서울광장에 도착한 오전 11시 경에는 이미 100여개가 넘은 참가단체들이 부스를 열고 분주히 홍보물을 나눠주고 있었다. 커밍아웃한 자녀를 둔 부모들의 모임인 ‘성소수자 부모모임’과, 난민과 성소수자라는 두 가지 이유로 차별받는 사람들을 위해 조직된 ‘소수자난민인권네트워크’, 성별이분법(모든 사람들의 성별을 남자와 여자로만 나누고 성별 간 이동을 금지하는 사회규범)에 저항하는 ‘여행자’ 등 다양한 인권단체의 부스 앞에는 많은 참가자들이 모여 뜨거운 관심을 보였다.

성 중립 화장실 개설을 위한 서명운동을 벌이던 ‘여행자’의 관계자는 기자에게 “트랜스젠더를 비롯한 많은 성소수자들이 공중화장실을 이용할 때 굉장히 큰 불편을 겪는다. 남자로 보이는 사람, 여자로 보이는 사람이 아닐 경우에는 시선 폭력이나 물리적 폭력이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 때문에 공중화장실에 들어가지 못하는 트랜스젠더 퀴어가 굉장히 많다”고 열변을 토했다. 이날 서울퀴어문화축제 현장에는 실제로 성 중립 화장실이 설치‧운영됐다.

올해 서울퀴어문화축제에는 4개 단체가 스폰서로, 3개 단체가 파트너 자격으로 참여했다. 이 중에는 국내 최초 하드포킹(기존 블록체인과 호환되지 않는 새 블록체인에서 암호화폐를 만드는 것) 암호화폐인 ‘마이크로비트코인’도 있다. 마이크로비트코인의 부스를 지키던 관계자에게 “퀴어와 암호화폐가 무슨 관련이 있나”고 묻자 ‘다양성과 개방성’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비트코인도 누군가 주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참여자) 스스로 기여하는 부분이 있다. 마이크로비트코인은 전 세계에서 누구나 같이 모여서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다. (퀴어문화축제와) 철학이 맞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다”는 설명이다.

법조계와 의료계도 LGBT의 권리를 논하기 위해 자리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이하 ‘민변’)’은 지난 2012년부터 소수자인권위원회를 두고 성소수자의 권리 보호를 위해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날 퀴어문화축제 현장에서 만난 민변의 장길완 간사는 “성소수자 관련 활동가, 또는 당사자들이 권리를 침해받았을 때 법적 대응을 하고 동료상담을 진행한다. 성소수자 권익을 위해 어떤 법률이 제정돼야 하는지 의견서를 제출하기도 한다”고 소수자인권위원회의 활동을 소개했다.

의과대학학생연합회 인권국에서는 성소수자들이 병원에서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시사위크>

퀴어의 건강권을 외친 이들은 의과대학학생연합회 인권국에서 나온 의학대학생들이다. 의과대학학생연합회 내에 인권국이 설치된 것은 올해 봄의 일이다. 30도가 넘는 폭염 속에서도 목청 높여 이벤트 참여를 독려하던 이 대학생들은 “한국의 LGBT들은 병원에 갔을 때 많은 불편을 겪고, LGBT들의 건강이 일반인들에 비해 더 좋지 않다는 연구 결과도 많다. 그러나 교육과정에는 이런 내용들이 거의 포함돼있지 않다. 퀴어들이 병원에 갔을 때 어떤 점들을 불편해하고, 이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알아보기 위해 나왔다”고 퀴어문화축제 참석 이유를 설명했다.

행사장 입구를 기준으로 왼편에 배치된 부스들이 다소 학술적이고 점잖은 분위기였던 반면 시청과 인접한 반대편에서는 보다 활기 넘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컴투게더’‧‘퀴어홀릭’ 등의 대학 성소수자 동아리들과 각종 온‧오프라인 성소수자 커뮤니티들의 부스가 밀집돼 있었기 때문이다. 성 정체성을 숨길 이유가 없어진 공간에서 자유롭게 어깨와 허리를 드러낸 LGBT 참가자들과 온몸을 무지개 색깔로 치장한 외국인들이 색채를 더했다. 십자가를 등에 매고 사슬로 몸을 감은 퍼포먼스를 펼친 참가자도 있었다.

화려하고 유쾌한 댄스그룹 '화이트라이스 벌레스크 리뷰'

축제에 완벽하게 어울리는 복장을 하고 있는 이 세 사람은 ‘화이트라이스 벌레스크 리뷰’라는 이름의 공연 팀 소속이다. 단체 소개를 부탁하자 “노래와 춤, 퍼포먼스를 즐기는 그룹이다. 서울이 주된 무대지만 한국 어디서든 공연한다. 지난주에는 부산에서 했고, 포항도 간 적 있다”고 답변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가치관을 ‘자기 몸 긍정주의(획일화된 미의 기준을 버리고 자신의 몸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와 비차별주의로 요약했다.

앰네스티는 부당하게 구금중인 트랜스젠더 난민의 구명운동을 진행했다. <시사위크>

국제사면위원회(앰네스티)의 부스 앞에는 ‘트랜스젠더 난민 알레한드라를 석방하라’는 문구가 적힌 포스터가 세워져있다. 뉴질랜드 출신으로 2016년부터 한국에서 활동했다는 톰 레이니스미스 간사로부터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엘살바도르 출신의 트랜스젠더인 알레한드라는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했지만 이민국은 그녀의 망명자 지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현재 알레한드라는 미국 뉴멕시코의 시볼라 난민수용소에 구금돼있으며 그녀를 비롯한 트랜스젠더 난민들은 충분한 의료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 레이니스미스 간사는 “앰네스티는 다른 모든 사람들의 권리를 살펴보는 것처럼 트랜스젠더의 권리도 주목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의료적 관심과 의료보장은 트랜스젠더 권리 보호를 위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레이니스미스 간사에게 뉴질랜드와 한국의 LGBT 인권을 비교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뉴질랜드에서는 (한국과 달리) 어떤 두 사람이든 결혼할 수 있다”고 운을 떼면서도 “아직도 해결해야하는 많은 이슈들이 있다. 특히 어린 LGBT들은 학교에서 매우 힘든 시간들을 보내고 있으며, 때로는 자해를 하는 경우도 있다. 이는 한국에서도 똑같이 나타나는 일들이다. ‘전환치료’도 여전히 만연하다. 이것은 정부가 막아야 한다”는 의견을 밝혔다. 전환치료는 LGBT의 성적 지향을 이성애로 바꿀 수 있다고 주장하는 심리치료방식으로, 주류 학계에서는 사이비로 분류된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제정하고 동성결혼을 합법화한 많은 국가들은 대사관을 통해 서울퀴어문화축제에 지지를 보냈다. 이날 미국‧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 북유럽 4개국과 유럽연합 대표부를 비롯한 영국‧독일‧네덜란드 등 각국 대사관들이 서울광장에 부스를 열고 자유로운 성적 지향의 가치를 홍보했다.

영국(왼쪽)과 캐나다(오른쪽)을 비롯한 다수의 대사관들이 서울퀴어문화축제에 지지를 보냈다. <시사위크>

온통 단풍잎으로 뒤덮인 오른쪽 남자는 다름 아닌 에릭 월시 주한 캐나다 대사다. 2015년 2월 주한대사로 임명된 월시 대사는 부임 후 서울에서 열린 네 차례의 퀴어문화축제에 모두 참석했다. 작년과 올해의 퀴어문화축제를 비교해달라고 묻자 월시 대사는 “물론 올해가 훨씬 낫다. 작년에는 비가 왔기 때문이다”고 말하며 씩 웃었다. 캐나다 대사관이 한국의 퀴어문화축제에 참가하는 의의에 대해 질문하자 보다 진지한 표정으로 “우리가 다양한 성적 지향을 가진 사람들의 평등을, 또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의 권리를 지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는 답을 줬다.

기독교계의 반 동성애 운동에 항의하는 피켓을 든 청년. <시사위크>

울타리 너머에서는 한 남성이 ‘혐오는 예수의 방법이 아니다’고 적힌 피켓을 들고 뙤약볕에 서 있었다. 스스로를 “교인”이라고 소개한 이 청년은 “기독교에서는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지 말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성경에 동성애를 금기시하는 말도 없다. 동성애 개념이 나온 것도 18세기부터다”고 1인시위에 나선 이유를 설명했다. 그가 선 서울광장 서쪽 방면으로는 퀴어문화축제와 도로 하나만을 사이에 두고 동성애에 반대하는 기독교 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대부분이 고령인 반 동성애 집회의 참가자들 일부는 퀴어문화축제 출입구까지 와서 동성애 반대 문구가 써진 팻말을 흔들었으며, 몇몇은 이 청년에게 다가와 무언가를 따져 묻기도 했다.

약 한 시간 반의 차이를 두고 퀴어 퍼레이드와 반 동성애 행진이 열렸다. <뉴시스(좌)/시사위크(우)>

‘레인보우 라이더스’를 필두로 도심을 행진하는 퀴어 퍼레이드는 퀴어문화축제의 꽃이다. 4시 30분부터 시작된 이 행진은 두 시간 동안 을지로입구와 회현사거리를 거치는 약 4킬로미터의 코스를 소화했다. 한편 기독교단체가 중심이 된 반 동성애 집회는 이보다 약 한 시간 반 앞서 십자가와 확성기를 들고 세종대로를 가로질렀다. ‘결혼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합이다’나 ‘아빠, 엄마 사랑해요’ 등 전통적 가족공동체를 옹호하는 문구들이 주를 이뤘다.

오후 3시 경 늦은 점심식사를 마치고 다시 서울광장으로 향하던 기자 앞에서 극적인 모습이 연출됐다. 갓길 쪽에서 행진하던 반 동성애 집회 참가자 중 한 명이 도보로 올라서더니 카페에서 담소를 나누던 퀴어문화축제 참가자들에게 십자가를 들이밀었다. 유리창 너머에서 자신들의 성 정체성을 부정하는 노인과 마주한 이들은 웃으며 무지개 깃발을 흔들어보였다. 아마도 이것이 다양성을 대하는 퀴어문화축제의 자세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