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죄 폐지를 주장하는 시민들이 11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기자회견을 마친 뒤 '낙태죄 헌법불합치' 판결에 환호하고 있다. / 뉴시스
낙태죄 폐지를 주장하는 시민들이 11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기자회견을 마친 뒤 '낙태죄 헌법불합치' 판결에 환호하고 있다. / 뉴시스

[시사위크=은진 기자] 헌법재판소가 낙태(인공임신중절수술)를 한 여성을 처벌하는 ‘낙태죄’를 규정한 현행 형법 조항이 헌법에 위배된다고 판단했다. 낙태를 형법 상 범죄로 규정한 지 66년만이다. 헌재의 헌법불합치 결정에 따라 국회는 2020년 12월 31일까지 법을 개정해야 한다.

헌재는 11일 임신한 여성의 자기낙태를 처벌하는 형법 제269조 제1항, 낙태 수술을 한 의사를 처벌하는 형법 제270조 제1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의견 4명, 단순위헌 3명, 합헌 2명 의견으로 헌법불합치 결정을 선고했다.

‘헌법불합치’ 결정은 사실상의 위헌 결정으로, 해당 법률을 바로 무효화했을 시 야기될 사회적 혼란을 고려해 일시적 시한을 주고 법 개정을 하도록 유도하는 결정이다. 위 조항들은 국회가 개정할 때까지 계속 적용되며, 2020년 12월 31일이 지나면 무효화된다.

헌법불합치 의견을 낸 유남석·서기석·이선애·이영진 재판관은 낙태를 한 여성을 처벌하는 자기낙태죄 조항이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하고 있다는 데 초점을 맞췄다. 이들은 “자기낙태죄 조항은 입법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필요한 최소한의 정도를 넘어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제한하고 있어 침해의 최소성을 갖추지 못했고, 태아의 생명 보호라는 공익에 대해서만 일방적·절대적 우위를 부여해 법익균형성의 원칙도 위반했다고 할 수 있다. 과잉금지원칙을 위반해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위헌적 규정”이라고 했다.

또 “모자보건법이 정한 일정한 예외에 해당하지 않으면 모든 낙태가 전면적·일률적으로 범죄행위로 규율돼 낙태에 관한 상담이나 교육이 불가능하고, 낙태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충분히 제공될 수 없다. 낙태 수술과정에서 의료 사고나 후유증 등이 발생해도 법적 구제를 받기가 어려우며, 비싼 수술비를 감당해야 하므로 미성년자나 저소득층 여성들이 적절한 시기에 수술을 받기 쉽지 않다. 또한 헤어진 상대 남성의 복수나 괴롭힘의 수단, 가사·민사 분쟁의 압박수단 등으로 악용되기도 한다”고 낙태죄 조항이 임신한 여성의 현실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를 지적했다.

단순위헌 의견을 낸 이석태·이은애·김기영 재판관은 “이른바 ‘임신 제1삼분기(대략 마지막 생리기간의 첫날부터 14주 무렵까지)’에는 어떠한 사유 요구 없이 임신한 여성이 자신의 숙고와 판단 아래 낙태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는 점”을 들어 “자기낙태죄 조항 및 의사낙태죄 조항에 대하여 단순위헌결정을 해야 한다”고 보다 진보적으로 판단했다.

소수의견인 합헌 의견을 낸 조용호·이종석 재판관은 “지금 우리가 자기낙태죄 조항에 대한 위헌, 합헌의 논의를 할 수 있는 것도 우리 모두 모체로부터 낙태당하지 않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태아였다”며 “태아와 출생한 사람은 생명의 일련의 연속적인 발달과정 아래 놓여있다고 볼 수 있으므로 인간의 존엄성의 정도나 생명 보호의 필요성과 관련하여 태아와 출생한 사람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헌법재판소는 11일 임신한 여성의 자기낙태를 처벌하는 형법 제269조 제1항, 수술한 의사를 처벌하는 형법 제270조 제1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 뉴시스
헌법재판소는 11일 임신한 여성의 자기낙태를 처벌하는 형법 제269조 제1항, 수술한 의사를 처벌하는 형법 제270조 제1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 뉴시스

◇ 여성단체 ‘환호’… 공은 국회로

이날 오전부터 헌법재판소 앞에서 집회를 진행하던 여성단체는 헌재 선고가 나오자 환호했다. 한국여성단체연합은 “66년간 형법에 존재했던 낙태죄에 대한 이번 결정은 국가가 발전주의를 앞세워 여성의 몸을 인구 통제를 위한 출산의 도구로 삼았던 지난 과거와의 단절을 의미한다”며 “여성의 존엄성, 자기 결정권을 침해하고 여성들의 삶을 억압하던 낙태죄를 폐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여성들 모두의 승리”라고 평가했다.

한국여성민우회는 “형법 제정 이후 66년 만에 우리는 ‘낙태’가 죄가 아니라, ‘낙태죄’가 바로 명백한 인권 침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 역사적인 선고는 수많은 이들의 용기와 싸움, 그리고 연대를 통해 함께 이뤄낸 귀중한 성취”라며 “낙태죄는 폐지 수순을 밟게 될 것이며 국회와 정부는 임신중지에 대한 비범죄화를 분명하게 매듭지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역시 “형법개정과 모자보건법의 전면 개정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임이 천명됐다”며 “임신중지의 경험은 특별한 몇몇 여성들의 경험이 아니다. 수많은 여성들이 이야기하지 못하고 혼자 감당해왔던 경험들이었다. 낙태가 불법이 아니었다면 혼자 감내하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여성들이 거리에 나와 국가와 사회에 요구했기 때문에 이 날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입장을 냈다.

인도주의를실천하는의사협의회 소속 윤정원 산부인과전문의는 헌재 판결 직후 헌법재판소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그동안 임신중지가 필요한 여성이 병원에 찾아와도 ‘도와드릴 수 있는 게 없습니다’라고밖에 못했다. 성폭력 피해자임에도 임신중절을 해주는 병원이 없어서 전국에서 찾아오는 여성들이 떠올랐다”며 “이제 당신이 어떠한 상황에 처해있든 최선을 다해 안전하게 돕겠다는 말을 할 수 있는 날이 와서 너무 기쁘다”고 했다.

국회는 2020년 말까지 해당 법안을 개정해야 하는 숙제를 떠안게 됐다. 특히 내년 4월에 21대 국회의원 총선거가 예정돼있어 낙태죄 개정에 대한 각 당의 입장이 표심을 좌우할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더불어민주당은 “헌법재판관들이 심사숙고 끝에 내린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을 깊이 존중하며, 국회는 각계각층의 의견을 수렴하여 법적 공백에 따른 사회적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조속히 형법 및 모자보건법 등 관련 법 개정에 나설 것을 당부한다”고 했다. 바른미래당도 “국회는 헌법재판소의 판단에 따라 전문가와 시민사회의 의견을 수렴해 입법 작업을 속히 진행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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