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8일 오전 광주 서구 일제강제동원 피해자 양금덕 할머니 집을 찾아 양 할머니의 손을 잡고 있다. / 뉴시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8일 오전 광주 서구 일제강제동원 피해자 양금덕 할머니 집을 찾아 양 할머니의 손을 잡고 있다. / 뉴시스

시사위크=이선민 기자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문제와 관련해 한일 외교당국이 민간 기부금으로 재원을 마련해 피해자들에게 배상금을 지원하는 방향의 해법을 마련하고 있는 사실이 알려졌다.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일본 측의 사과 없는 배상금 지급은 의미가 없다고 반발했다.

28일 오전 광주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만난 일제 강제 동원 피해자 양금덕 할머니는 배상금에 대해 “그 사람들한테 사죄받고 싶지 (돈은) 안 받고 싶소”라며 “같은 동지끼리 받으면 내가 마음이 안 좋다”라고 말했다. 양 할머니는 “잘못한 사람은 따로 있는데 내가 왜 한국 사람을 성가시게 하냐“며 “받아도 그 사람들에게 사죄 받고 싶지 어영부영 누가 돈 주고 그런 건 안 받는다”고 분명히 했다.

이 대표는 같은 날 광주 현장 최고위원회의에서도 “억울하게 강제 징용 피해를 입은 당사자가 ‘나는 사과를 받고 싶다. 진심 어린 사과와 상응하는 책임을 지게하고 싶다’ 이렇게 입장을 가지고 지금까지 열심히 싸워 왔는데, 정부의 태도가 ‘국내 기업들 협찬을 통해서 배상을 해주는 방법을 강구하겠다’고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누군가가 억울한 피해를 입어서 가해자한테 ‘사과해라, 책임져라’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지나가는 사람이 지갑 꺼내면서 ‘얼마 필요해?’ 하는 느낌이 들었다”며 “피해자의 진정성이나 피해자의 간절한 사과 요구를 폄하하고 모욕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돈 문제 때문인 것처럼 만드는, 피해자를 모욕하는 행태가 참 납득되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 ‘유력한 정부안’은 무엇? 

한일 외교당국은 지난 26일 일본 도쿄에서 국장급 회의를 개최하고 강제징용 배상 문제 해법을 중점적으로 논의했다. 외교부 당국자는 이날 “동시에 합의문으로 발표하는 것은 아니며, 우리가 어떤 해법을 발표한 이후 일본이 그에 대해 성의 있는 조치를 발표하는 형식이 되지 않을까 싶다”고 밝혔다.

현재 검토되고 있는 배상 해법은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민간에서 기부금을 받아 재원을 조성하고, 배상소송의 피고인 일본 기업 대신 징용 피해자에게 배상금을 지급하는 방안이다. 일본 정부의 직접적 사과를 요구하고 있는 피해자들의 반발을 예상한 듯 외교부는 아직 정부안이 확정되지 않았다고 선을 그었다.

하지만 강제징용 피해자 측 법률대리인단과 지원단체는 “지난주 경 외교부 실무자가 피해자 측을 만나 해법을 설명했다”며 이미 유력한 정부안이 확정됐다고 보고 있다. 지원 단체가 제안 받은 정부안은 재단이 한국 기업들의 기부로 재원을 마련해 확정 판결을 받은 피해자들에게 변제한다는 내용으로 일본 가해 기업의 참여와 사죄가 포함되지 않았다.

만약 정부안이 이대로 확정된다면 대법원의 판결에도 배치된다. 대법원은 지난 2018년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미쓰비시중공업과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일본 기업의 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을 확정한 바 있다. 대법원은 양금덕 할머니와 김성주 할머니 등 5명에게 '미쓰비시 중공업은 1억~1억5,000만원씩을 배상하라'는 확정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일본 기업은 아직 피해자들에게 배상금을 지급하지 않고 있다. 피해자 측이 일본 기업의 한국 내 자산을 압류한 뒤 매각해 배상금을 지급해달라는 강제집행 신청을 내면 일본 기업은 소송 서류를 받아보지 않고 시간을 끌거나 ‘즉시 항고’하고 있다. 또한 우리 외교부가 대법원에 “강제 현금화 이전에 외교적인 해결방안을 강구하고 있다”는 취지의 의견서를 내면서 대법원이 심리불속행 기각 결정을 내리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28일 서울 종로구 주한일본대사관 인근에서 열린 2022년 돌아가신 일본군성노예제 피해자 추모제 및 1576차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수요시위가 열렸다. 이날 시위현장에 5월에 세상을 떠난 김양주 할머니와 12월 26일에 세상을 떠난 이옥선 할머니의 영정이 놓여 있다.  / 뉴시스
28일 서울 종로구 주한일본대사관 인근에서 열린 2022년 돌아가신 일본군성노예제 피해자 추모제 및 1576차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수요시위가 열렸다. 이날 시위현장에 5월에 세상을 떠난 김양주 할머니와 12월 26일에 세상을 떠난 이옥선 할머니의 영정이 놓여 있다.  / 뉴시스

◇ 야권‧피해자 반대에도 묵묵부답

미쓰비시의 국내자산 강제 매각에 앞서 외교부가 꺼낸 ‘외교적 해결방안’은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요구와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여기다 위안부 피해자 고(故) 이옥선 할머니가 지난 27일 급성폐렴에 의한 패혈증으로 별세하면서 여론은 정부의 배상안에 등을 돌리는 분위기다.

이수진 민주당 원내대변인은 27일 “윤석열 정권의 일제 강제동원 피해에 대한 한국 기업의 기부 보상안은 박근혜 정권의 대일 굴종 외교와 판박이”라며 “강도에게 받은 피해를 왜 이웃 주민들이 보상해 주느냐. 외교부 방안에는 일본 정부와 전범 기업의 사과와 배상은 없다. 피해자의 요구를 무시한 방안을 우리 정부가 해법이라고 내놓고 있으니 참담하다”고 비판했다.

김희서 정의당 수석대변인도 “일본군성노예제 피해자이셨던 이옥선 할머니께서 별세하셨다”며 “강제동원 피해자 측은 처음부터 일본 정부의 사과와 전범 기업의 배상이 문제 해결의 최저선이라는 뜻을 줄곧 밝혀왔다. 이것이 대한민국의 역사적 입장이고, 국민의 상식이다. 일본 이야기만 나오면 벌벌벌 떨며, 몰역사와 비상식으로 굴욕외교의 전형을 보이는 윤석열 정부를 국민들은 납득할 수가 없다”고 꼬집었다.

이같은 질타에도 정부는 묵묵부답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후보시절부터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강조했고, 북한의 도발로 한‧미‧일 군사동맹을 강조하는 시점에서 일본의 배상만을 부르짖을 수 없다는 입장으로 해석된다. 야권에서는 군사동맹과 강제징용 배상을 분리해서 다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한 외교부 관계자는 <시사위크>와의 통화에서 “복잡한 외교 상황을 그렇게 단순하게 분리할 수 없다”고 난색을 표했다.

◇ 인권상 시상까지 무산

뿐만 아니라 양금덕 할머니의 인권상 시상도 무산되면서 정부에 대한 질타는 더욱 강화되고 있다. 이재명 대표는 28일 “양금덕 할머님에 대한 인권상 시상, 또 국가 훈장 수여가 미뤄지는 것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고 지적했다. 정의당 위선희 대변인 또한 “강제징용 피해자 양금덕 할머니의 국민훈장 모란장 서훈을 돌연 보류하더니 이제는 외교부가 앞장서서 일본 전범 기업의 배상금액 대납을 해주려 안달이 났다”고 짚었다.

양 할머니는 초등학교 시절인 일제 강점기에 미쓰비시중공업에 강제 동원됐다. 양 할머니는 1992년에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시작했고, 30년간 피해자 권리회복에 앞장서 온 공로로 대한민국 인권상(국민훈장 모란장) 수상자로 통보받았다. 하지만 지난 6일 시상식을 사흘 앞두고 외교부가 ‘사전 협의가 필요한 사항’이라는 의견을 내면서 서훈이 사실상 취소됐다.

박진 외교부 장관은 “얼마든지 재검토할 수 있고 훈장을 주는 것 자체에 대해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고 해명했다. 안은주 외교부 부대변인도 “한일 현안 관련 합리적인 해결 방안을 조속히 마련해 나가기 위한 다양한 외교적 노력을 하고 있다”며 대일 저자세 외교가 아니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과 야권에서는 일본의 눈치를 보는 외교부의 반대로 취소됐으며, 2015년 한일합의를 부활시키려는 움직임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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