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이후 단절됐던 조선과 일본의 교류는 어떻게 회복됐을까. 사진은 조선통신사의 행렬. / 게티이미지뱅크
임진왜란 이후 단절됐던 조선과 일본의 교류는 어떻게 회복됐을까. 사진은 조선통신사의 행렬. / 게티이미지뱅크

시사위크=서예진 기자  한국과 일본은 지리적으로 가깝지만, 가까운 거리만큼 양국 관계가 친밀하다고 규정하기는 어렵다. 양국의 민간 교류와 별개로 한반도는 왜구의 침입에 시달리는 일이 잦았기에 어느 정도 긴장 관계는 유지하고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 단절됐던 조일관계(조선·일본관계)는 일본 막부 측의 요청으로 국교가 재개됐다. 반면 ‘강제징용 배상 판결’로 악화됐던 한일관계는 한국 정부의 ‘해법’ 제시로 해빙 무드로 들어갔다. 

당연한 결과지만 임진왜란 이후 조선과 일본의 모든 교류는 끊어졌다. 새로 수립된 도쿠가와 막부는 조선과 교류 재개가 필요했다. 쓰시마 섬(대마도)의 경우, 배를 곯아야 하는 처지였다. 조선 국왕에게 매년 하사받던 쌀과 콩도 들어오지 않고 무역도 단절됐기 때문이다. 이에 쓰시마 섬의 사신은 전쟁이 끝난 지 불과 1년도 되지 않은 1599년 부산에 건너온 것으로 전해졌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조선과의 강화를 원했다. 도쿠가와는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도요토미 파를 제거해야 했다. 효종실록에 따르면, ‘도쿠가와가 도요토미 파를 칠 때 임금을 시해한 죄, 조선 사람을 함부로 죽인 죄를 물었다’는 전언이 있다. 즉 도요토미 가를 멸문하는 명분으로 조선 침공을 언급했으니, 다음 행보는 조선과의 교류 재개였다. ‘국내 정치를 위해 외교를 활용’한 셈이다. 

1600년 일본의 강화 요청에 조선은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일본이 자발적으로 조선에 보내준 전쟁 포로들은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강화를 원하고 있으며, 대마도 영주를 중심으로 강화론을 주장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일본 측이 강화를 요구하며 또 다시 침공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 ‘명분’과 ‘실리’는 누가?

이후 도쿠가와 막부가 자발적으로 풀어준 포로가 돌아와 ‘조선이 화호를 불허하면 일본이 재침할 가능성이 있다’고 전했다. 조선은 진위 확인을 위해 ‘탐적사’(探賊使)를 보냈는데, 당시 탐적사를 이끌고 일본에 파견된 사람이 사명대사다. ‘뜨거운 방에서 죽이려 했지만 다음날 아침에 보니 방안에 고드름이 얼어 있었다’ 등 사명대사가 일본에서 벌인 이적(異蹟)은 이미 야사로 유명하다. 

그럼에도 조선은 쉽게 교류 재개를 허락하지 않았다. 침략을 당했던 입장이니 일본의 요청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셈이다. 이에 조선은 1606년 8월 △일본 국왕 명의의 국서 △선·정릉의 도굴범 압송 △포로 송환 등 3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이에 일본은 9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국서와 도굴범 두 명을 보냈다. 

하지만 국서는 소 요시토시(대마도 영주)가 위조를 한 것이고, 도굴범은 가짜였다는 점이 문제였다. 그럼에도 조선은 요구가 관철됐다는 명분과 교섭의 주도권을 조선이 가진다는 외교적 실리를 취해 1607년 1월 강화를 위한 조선 사절단이 막부에 파견됐다. 이를 ‘회답겸 쇄환사’(回答兼刷還使)라고 했다. 국교 재개 요구에 ‘회답’하고 포로를 ‘쇄환’하기 위한 사절이란 의미다. 

양국은 1609년 무역을 위한 기유약조를 맺었고, 임진왜란에 의해 단절된 교린관계도 회복했다. 전쟁은 끝났지만 조선은 회답겸쇄환사를 몇 차례 보내 포로를 송환하기도 했다. 물론 국서 조작은 30년쯤 후에 들통 났지만 이미 명청 교체기에 들어선 중국 대륙의 사정으로 인해 조선은 별 다른 항의를 하지 않았고, 1636년부터는 조선통신사를 부활시켰다. 

1600년대에서 2023년으로 돌아와 보자. 최근 몇 년간 한일관계는 험악했다.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 이후 일본은 이를 항의하며 수출규제를 했고, 한국은 이에 맞서 WTO(세계무역기구)에 제소했다. 강대강으로 치달은 양국의 대치가 해결되려면 양보가 필요했다. 한국은 일본의 수출규제를, 일본은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을 원인으로 꼽았다.

결국 정권이 교체되면서 우리는 양보를 했고, 일본은 양보를 하지 않았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3월 일본 방문에 앞서 정부는 ‘강제징용 해법’을 냈다. 국내에서 많은 반발이 있었다. 일본은 한일관계 회복의 ‘명분’으로 삼았다. 일본 기업이 강제징용 피해자에게 배상을 하지 않을 ‘실리’도 챙겼다. 

우리의 양보가 없었다면 한일 정상이 두 달 사이에 셔틀외교를 할 만큼 한일관계가 회복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분석이 있다. 400년전과 비교해 봤을 때 어느 쪽이 명분과 실리를 챙긴 것인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침략을 당한 조선은 명분과 실리를 챙겼다. 그럼 2023년 이 모두를 챙긴 일본은 어떤 피해를 본 것일까. 한일관계 경색에 우리의 귀책이 있었던 것일까. 

 

근거자료 및 출처
선조실록 122권, 선조 33년 2월 24일 무술 3번째기사 (1600년) / 일본에 포로로 끌려갔다 돌아온 백성들이 강화와 포로 쇄환 문제로 글을 올리다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302024_003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122권, 선조 33년 2월 26일 경자 3번째기사 (1600년) / 비변사와 왜적이 강화를 요구하는데 따른 대책을 논의하다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302026_003

  조선왕조실록
효종실록 14권, 효종 6년 1월 25일 경술 2번째기사 (1655년) / 12년전 동래 부사 임의백을 불러서 일본의 사정에 관해 자세히 듣다

http://sillok.history.go.kr/id/kqa_10601025_002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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