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와 심환지, 정적으로 여겨졌던 그 둘의 관계가 재해석된 것은 2009년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비밀 편지 300여통이 발견되면서부터다. / 전통문화포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정조와 심환지, 정적으로 여겨졌던 그 둘의 관계가 재해석된 것은 2009년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비밀 편지 300여통이 발견되면서부터다. / 전통문화포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시사위크=서예진 기자  정조와 심환지, 한때 그 둘은 정적(政敵)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2009년 발견된 어찰(御札·임금의 편지) 덕에 그 둘의 관계가 알려진 것과 달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혁신 군주, 탕평 군주인 정조의 인간적 면모가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에 드러났다. 우리는 여기서 정치의 단면만 봐선 안 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 혁신 군주 정조, 사실은 독선적인 모습도?

조선의 제22대 왕 정조(재위 1776~1800년)는 영조, 사도세자 뿐 아니라 본인 역시 이야깃거리가 많은 임금이기에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 인지도만큼이나 대중매체에 자주 등장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례를 들자면 영화 ‘영원한 제국’(1995)은 말년의 정조가 등장하는 반면, ‘사도’(2015)에서는 아버지를 잃는 어린 세자의 모습이 주로 등장했다. 

또 정통 사극에서는 주·조연으로 수없이 등장했다. 예전에는 영조, 혜경궁 홍씨, 사도세자, 홍국영 등 주변 인물들의 드라마틱한 삶이 더 많이 조명되면서, 정조 본인은 사도세자의 아들, 탕평 군주 등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시간이 지나자 정조가 혁신 군주이자 아깝게 죽었다는 이미지가 강해지면서 그의 정적은 노론이나 정순왕후였다는 인식이 대중을 지배했다. 

그러나 이제는 정조가 상당히 독선적인 면모를 갖고 있었다는 점을 아는 사람은 아는 것 같다. 가장 최근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2021)에서 이전에 방영한 ‘이산’(2008) 등과는 다른 모습의 정조가 나온다. 여기서 가수 겸 배우 이준호는 ‘까칠한’ 임금, 독선적인 임금이었던 정조의 모습을 어느 정도 잘 보여준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정조에게 다른 이미지가 생긴 것은 언제부터일까. 그것은 정조가 노론 벽파의 영수이자 좌의정 등을 역임했던 심환지에게 1796년 5월부터 1800년 윤4월까지 보낸 비밀 편지 300여통이 2009년에 발견되면서 시작됐다. 이것은 공식적인 문서가 아니라 둘 사이 오고 간 사적인 편지였다. 

원래 누구도 그 편지의 존재를 모르도록 정조는 ‘읽은 후에 폐기하라’고 신신당부했지만, 우리가 이 편지의 존재를 안 것을 보면 심환지가 편지를 고이고이 보관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아마 심환지는 정치적으로 곤경에 빠졌을 때 이 편지를 공개할 생각이었던 것 같다는 게 학계의 추측이다. 일종의 ‘보험’인 셈이다. 역사 연구를 하는 이들은 심환지가 편지를 태우지 않은 것에 고마워할 터다. 

◇ ‘절대군주’ 정조도 했던 야당 관리

300여통의 편지를 모두 살펴볼 수는 없지만,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세 가지다. 첫째는 이 편지가 ‘비밀’이라는 점, 둘째는 정조의 매우 솔직한 면모를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욕설에 가까운 표현도 들어 있고, 독선적인 성정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셋째는 정조 자신의 일신상의 비밀이나 사람에 대한 판단 기준, 조정 신하들에 대한 속내 등 그야말로 ‘민낯’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편지에는 인사 문제에 대한 언급 비중이 높고, 정치 현안에 대한 자신의 뜻이 담겨 있기도 했다. 본인의 병세 같은 것도 상세하게 심환지에게 설명하면서 정조가 그를 상당히 신뢰했음을 알 수 있다. 또 ‘편지가 끊겼는데 나를 까맣게 잊었는가. 소식이 없어 아쉬웠다’는 서정적인 내용도 있었고, 심환지 부인의 병환에 쓰라고 약재를 보내줬다. 

이 편지가 발견되면서 정조는 당시의 조정(朝廷)을 막후에서 움직이는 ‘연출가’였다는 평가가 나왔다. 실제로 정조는 심환지에게 어떤 내용으로 상소를 작성하고 언제 올려야 하는지 편지에 적었다. 이는 심환지 뿐 아니라 소론 영수 서명선과 남인 영수 채제공에게도 지시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즉 정조는 모든 것을 뒤에서 연출해 무대에 올리고, 본인은 용상에 앉아 모르는 척 했다는 것이다. 

연출가가 중요 배역을 아무에게 맡기지 않듯, 정조 역시 심환지를 중요 배역으로 활용했다. 자신의 병세까지 지속적으로 상세하게 설명한 심환지는 정조 사후 평가에서 주요 정적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 편지를 통해 절대군주 정조의 ‘야당 관리법’이 드러났다. 단면만 봤을 때 대립 관계인 정조와 노론 벽파의 수장인 심환지는 사실 소통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잠시 한국을 떠나 미국의 사례를 찾아보자. 오바마는 격한 대치를 벌이는 공화당 의원을 초대해 식사를 한 바 있다. 링컨은 노예제 폐지(수정헌법 13조)를 통과시키기 위해 야당 의원들을 백악관으로 부르거나 직접 찾아가 설득, 읍소, 매수, 강요, 속임수 등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수단의 부분에서는 비판의 여지가 있을 수 있지만, 직접 소통을 했다는 점에서는 높은 점수를 받는다. 

다시 현재 대한민국으로 돌아와서 살펴보자. 여야는 소통이 완전히 끊긴 모습이다. 윤석열 대통령과 야당의 대표자들은 제대로 만나서 대화를 나눈 적이 없다. 더불어민주당이 주도해 법안을 통과시키면 윤 대통령은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하는 모습을 보였다. 양쪽의 소통 부재를 비판하면 각자의 이유를 든다. 정조, 링컨, 오바마가 보여준 모습, 우리는 볼 수 없는 것일까. 

 

근거자료 및 출처
조선 왕들은 왜? / 박영규 지음
2023. 02. 25 (출간) 옥당북스(출판사)
어찰의 정치학 - 정조와 심환지 / 안대희
2009. 05 역사비평 2009년 여름호(통권 87호)
새로 발굴한 정조어찰첩의 내용 개관 / 백승호
2009. 01 대동문화연구 제 6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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