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밀의 언덕’으로 관객을 찾은 이지은 감독. / 엣나인필름
영화 ‘비밀의 언덕’으로 관객을 찾은 이지은 감독. / 엣나인필름

시사위크=이영실 기자  오늘(12일) 개봉한 영화 ‘비밀의 언덕’은 모두에게 사랑받고 싶은 감수성이 풍부하고 예민한 5학년 소녀 명은(문승아 분)이 글쓰기 대회에 나가 숨기고 싶었던 진실과 마주하는,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다수의 단편 작업을 통해 실력을 쌓은 이지은 감독의 장편 데뷔작으로, 제72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제너레이션 Kplus 경쟁 부문 초청돼 일찌감치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이후 국내외 유수 영화제에 연이어 초청된 것은 물론, 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 CGV아트하우스 창작지원상, 제10회 무주산골영화제 나봄상(감독상)과 무주관객상, 제4회 평창국제평화영화제 심사위원상을 수상했다. 

“주체적이고 독립적이며 발칙하고 뜨거운 욕망 가진 새로운 10대 여성 캐릭터를 보여주고 싶었다”는 이지은 감독은 자전적인 경험을 반영한 사춘기 소녀 명은을 통해 그 시절 우리가 한 번쯤 겪었을 만한 감정을 섬세하면서도 담담하게 스크린에 옮겨냈다. 특별한 사건도, 자극적인 이야기도 아니지만, 각자의 기억을 소환하는 보편적인 스토리와 인물들의 섬세한 감정 묘사, 사려 깊은 연출로 진한 여운을 선사한다. 

명은 역의 문승아부터 명은의 담임 선생님 애란으로 분한 임선우, 명은의 엄마, 아빠 경희와 성호를 연기한 장선과 강길우, 혜진 역의 장재희까지, 배우들 역시 제 몫을 해내며 ‘비밀의 언덕’을 더욱 빛나게 완성했다.   

최근 <시사위크>와 만난 이지은 감독은 “아이라는 프레임을 지운 한 ‘여성’으로, 아니 그보다 더 넓은 개념인 한 ‘인간’으로 담아보고자 했다”며 “그렇게 방향을 정한 순간 상상할 수 있는 범위가 더 넓어졌다”고 연출 포인트를 짚었다. (*해당 기사에는 영화에 대한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돼있습니다.) 

그 시절 우리 모두를 떠올리게 하는 ‘비밀의 언덕’. / 엣나인필름
그 시절 우리 모두를 떠올리게 하는 ‘비밀의 언덕’. / 엣나인필름

-영화제에서 호평을 얻고 더 많은 관객과 만나게 됐다. 개봉 소감과 영화제에서 관객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었는지 궁금하다.  

“파이팅이 넘쳐있는 상태다. 영화를 조금이라도 더 알리고 싶어서, ‘비밀의 언덕’을 관객이 더 찾아주셨으면 해서 파이팅 넘치게 홍보하고 있다. (관객들이) 나의 이야기 같다고 하더라. 그게 되게 신기했다. 스태프들도 어떤 포인트인지 모르겠지만 다 자신의 어릴 적 이야기 같다고 했다. 명은이 마치 실존하는 인물인 것처럼 그의 미래에 대해서도 진심으로 걱정하는 게 재밌었다. 이입해 줬다는 것은 그만큼 리얼했다는 뜻이잖나. 신기했다.”

-영화의 출발이 궁금하다. 

“야심이 가득 차 있고 뜨겁고 발칙하기도 한, 작은 여성 인간을 영화 속에서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막연하게 있었다. 가정환경조사서부터 이 이야기가 시작됐는데, 그 인물과 그 시대에 있던 환경이 결합되면서 1996년 시대 속에 사는 인물 명은이 탄생했다. 자전적인 경험도 많이 투영했다. 하지만 그 경험이 오글거리지 않도록 주의했고, 내가 느꼈다고 해서 그걸 신뢰하지 않았다. 타인에게 끊임없이 물어보고 다른 사람들도 느끼고 있는지, 이런 사람도 있었을지 자료조사나 고증하는 과정을 철저하게 거쳤다. 또 내가 시나리오를 작업할 당시 공교롭게도 초등학교에서 예술 강사를 하고 있어서 초등학교 전학년을 만날 수 있었고, 덕분에 그들을 바라보는 맑은 눈이 생겼다.” 

-새로운 시선으로 10대 여성 캐릭터를 그려내고 싶었다는 의미로도 들린다.

“(기존 영화에서) 성인이 만들기 때문에 그들이 보고 싶은 모습이 투영되고 있는 것 같다. 명은을 보면서 누군가는 너무 영악한 게 아니냐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 민낯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싶었고, 그 행동이 충분히 설득력이 있기 때문에 어떤 장치를 인해 미화되는 것을 경계했다. 아이의 귀여운 행동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 야망에서 오는 설득력 있는 행동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필터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담아내고자 했다. 민낯의 얼굴을 그리고 싶었고 거침없이 담아내고 싶었다.”

주체적이고 입체적인 매력으로 완성된 명은. / 엣나인필름
주체적이고 입체적인 매력으로 완성된 명은. / 엣나인필름

-감독의 실제 경험이나 모습이 반영됐다고 했다. 얼마나 담겨 있나. 

“첫 장면부터 반영됐다. 명은은 고민하다 고른 리본을 바꾸기 위해 다시 돌아가는데, 나 역시 다시 돌아가는 사람이다. 영화에서도 명은이 돌아가는 장면이 몇 군데 있다. 왜 돌아가야 할까, 나는 왜 다시 돌아가는 인간일까. 그 부분부터 나 자신을 탐구했다. 그것은 누군가를 생각하는 마음이었다.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을 좋아하기도 하고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기도 한다. 거기부터 시작이 된 것 같다. 명은처럼 행동한 적은 없지만 충분히 가능성 있는. 내 이름 ‘지은’에서 한 글자만 바꾼 ‘명은’은 그래도 픽션을 하겠다는 나의 다짐이 담기기도 했다. 명은뿐 아니라 혜진이나 애란에게도 나의 모습이 많이 투영됐다. 특히 애란은 성인이 돼서 느낀 감정들이 반영됐다.”

-명은의 행동이나 선택을 평가하지 않는 연출자의 시선도 좋았다. 의도한 부분일까.  

“이 영화를 하면서 가장 많이 한 말이 아이가 아닌, 여성 아니 그보다 더 큰 개념, 복잡한 내면을 가진 ‘인간’으로 그리고 싶다는 거였다. 아이라는 프레임을 벗어던지고 한 여성, 넓게는 인간으로서 그리자는 게 첫 목표였다. 그 프레임을 벗긴 순간 상상할 수 있는 범위가 넓어졌다. 쉬운 걸 예로 들자면 명은이 갈 수 있는 한계가 깨지니 많은 곳에 갈 수 있었다. 욕망을 주는 범위도 넓어졌다. 그런 명은을 관객이 마주했을 때 어떤 생각을 가질지 궁금하다.”

새로운 시선으로 담아낸 여성 캐릭터 명은(왼쪽)과 혜진. / 엣나인필름
새로운 시선으로 담아낸 여성 캐릭터 명은(왼쪽)과 혜진. / 엣나인필름

-명은을 아이가 아닌 하나의 여성, 인간으로 그리고 싶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왜 꼭 10대 소녀여야 했나. 

“작은 인간이 최초로 마주하는 혼란스러움을 표현하고 싶었다. 가족이랑만 살다가 처음으로 타인을 만나는 순간, 그들과 자신을 비교하게 되고 자신을 감싸고 있던 것들이 막상 사회에 나와 보니 이상하다고 느껴지는 최초의 순간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우리의 편견이 어디에서 생기는가, 그게 바로 학교였다. 또 그때의 명은이 지금은 30대, 40대가 됐을 텐데, 그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때는 물어볼 수 있는 곳이 더 없었기 때문에 ‘나만 잘못된 게 아니었구나, 너도 그랬지만 나도 그랬어’라는 위로를 주고 싶었다. 또 동시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고 어떤 어른이어야 하는지 생각하게 하는 기회가 되길 바랐다.”

-명은은 문승아를 만나 완전해졌다. 오디션을 통해 캐스팅했다고. 

“명은을 찾기 위해 4개월 동안 정말 많은 배우들을 만났다. 문승아는 ‘소리도 없이’나 ‘흩어진 밤’을 통해 너무 좋은 연기를 보여줬는데, 처음 만났을 때 도도하고 세련된 느낌과 달리 구수하고 스위트한 매력이 있었다. 편안하게 연기하는데 집중이 확 됐다. 자연스러움 속에 디테일이 있는 연기를 보여줬다. 대화가 잘 통했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로에 대해 많이 알게 됐다. 그렇게 명은을 만들어갔다.”

-혜진도 기존에 보지 못한 캐릭터였다.

“혜진은 명은을 망치러 온 구원자 같다. 혜진을 통해 명은은 승리감을 맛보기도 하고 자신이 통제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가짜 승리’다. 혜진은 그 순간 진짜 명은을 성장하게 인물인 거다. 명은의 입장에서는 혜진이 너무 싫고 힘든 존재일 거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명은을 힘들게 하지만 동시에 성장하게 하는 인물이 혜진이었다.” 

생생하게 살아 숨쉬는 인물의 모습을 담아낸 ‘비밀의 언덕’. / 엣나인필름
생생하게 살아 숨쉬는 인물의 모습을 담아낸 ‘비밀의 언덕’. / 엣나인필름

-명은의 엄마, 아빠는 그 시절 우리 부모님을 떠올리게 했다. 어떻게 그리고자 했나.  

“서로 다른 감수성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미 산전수전을 겪고 인생이 녹록지 않다는 걸 알게 된, 그렇게 살아왔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을 어른과 아직은 그 과정을 거치지 않은 어린 인간의 서로 다른 감수성. 잘잘못을 떠나 서로 바라보며 이해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다. 우리 모두 짐작은 하지만 알지는 못하잖나. 잘난 친구 앞에서 작아지는 아빠의 얼굴을 본 적 없고, 엄마의 연약한 면도 보지 못했다. 부모 역시 학교에서 아이가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가는지 알지 못한다. 영화라는 매개체를 통해 서로가 서로를 볼 수 있었으면 했고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계기가 되길 바랐다.”

-애란도 흥미로웠다.  

“선생님이라는 역할은 무수히 많이 봐왔잖나. 어떻게 다르게 만들어야 하나 고심했다. 1996년대 인물상을 다루면서도 어떻게 새롭게 접근해야 할지 고민했고, 배우(임선우)와도 이야기를 많이 했다. 애란은 어쩌면 큰 명은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인정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데 잘 하다가 뚝딱대기도 하고 이상한 모습만 보여주게 되는. 선생님도 하나의 인간이잖나. 어릴 때는 크게 보였는데 막상 커서 보니 선생님도 하나의 인간일 뿐이다. 사실은 완벽한 어른은 없고 그들도 어른이 처음이고 성장해 나간다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내가 사회에서 봤던 선생님들의 인간미 넘치는 모습, 아직은 어설프기도 한 그런 모습을 반영했다.”

‘비밀의 언덕’이 관객을 사로잡을 수 있을까. / 엣나인필름
‘비밀의 언덕’이 관객을 사로잡을 수 있을까. / 엣나인필름

-다양한 가족의 형태를 그렸다. 지극히 평범한 가족부터 유사 가족까지. 이유가 있다면.  

“명은이 가족과 학교라는 사회만 알다가 글쓰기를 통해 환경, 평화 등 큰 개념을 탐구하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 글짓기에서 오히려 다시 가족이라는 주제로 돌아오게 된다. 그 과정에서 명은은 자신의 가족과 다른 가족을 비교하면서 갈등이 커지게 되는데, 명은이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만나고 그들의 가족을 보면서 다시 돌아와 자신의 가족에 대해 생각해 보길 바랐다. 마지막 명은의 성찰을 이끌어내기 위함이었다.”  

-완전히 다른 색깔의 명은과 혜진의 글을 보는 것도 색다른 재미 포인트였는데.  

“나도 ‘글짓기 키즈’라서 주제만 나오면 도서관에 가서 책을 찾아보고 조사해 보기도 했다. 그런 모습을 명은에게 투영했다. 상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떻게 전략을 취해야 하는지, 대상을 받은 글은 어떻게 다른지 분석하며 치열하게 글을 썼던 기억이 있다. 명은과 혜진의 글에 차별점을 두고자 했고 실제 문승아, 장재희 배우와 만나 글을 써보기도 하고 낭독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명은이 언덕에 올라 원고를 땅에 묻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어떤 의도가 담겼나.  

“우선 언덕에 올라가는 것은 성장통에 비유한 것이기도 하지만, 명은이 언덕 위로 올라와 자신이 치열하게 돌아다닌 마을을 보길 바랐다. 동네를 보며 생각을 정리한다고 해야 할까. 환기를 한다는 의미로 언덕을 설정했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자신의 비밀을 묻는 의식을 통해 근사하게 마지막을 맺어주고 싶었다. 이 원고는 명은의 인생에 있어 역작이다. 너무 소중한 글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 잘 묻어주고 싶었다. 명은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서 제대로 의식을 치르게 하고 싶었다.”

앞날을 더욱 기대하게 하는 이지은 감독. / 엣나인필름
앞날을 더욱 기대하게 하는 이지은 감독. / 엣나인필름

-영화감독의 꿈은 언제부터 키웠나. 

“대학 때 연극을 전공해서 연극 연출이 되고 싶었는데, 졸업하고 우연히 밤에 영화를 보다가 완전히 빠져들었다. 내가 원하면 언제든 근사한 인물을 볼 수 있다는 게 너무 좋았고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이후 대학원에 가서 전공을 하고 열심히 단편을 만들었다. 그렇게 10년이 지났다.  

-마음을 뺏은 그 영화는 무엇이었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였다. 굉장히 무시무시한 스릴러인데, 거기에 나오는 인물들이 근사했다. 전에는 영화를 재미로, 오락적으로 봤는데 그 영화에서는 미술부터 조명, 인물의 신발이나 헤어스타일 하나까지 너무 근사하고 멋있는 거다. 대사도 너무 멋졌다. 반했다. 나도 허구의 세계지만 있을 법한 인물, 이야기를 매력적으로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나. 

“‘비밀의 언덕’에서도 굉장히 근사한 인물을 만들고 싶었다. 결핍이 있지만 그 결핍이 되게 매력적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앞으로도 누군가 일상을 살아가면서 문득문득 떠오르는 인물이 나오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매력적인 인물, 그리고 인간을 탐구하는, 인간 내면의 깊은 곳까지 갈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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